김현곤 강도사 / 렘 33:14-26

◎본문: 렘 33:14-26

◎개요

14-18절 여호와의 약속

19-22절 다윗과 레위인 제사장의 언약

23-26절 야곱의 회복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4절부터 18절까지는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내용이고, 19절부터 22절까지는 다윗과 레위인 제사장의 언약에 대한 말씀이고 23절부터 26절까지는 야곱의 회복에 관해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본문 14절 말씀 서두를 직역한다면, 보라 날이 이르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 31장 31절과 동일합니다. 예레미야는 31장에서는 새 언약을 약속했음을, 그리고 여기에서는 선한 말이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이라는 단어는 일과 사건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좋은 말, 좋은 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14절 중반에 내가 일러 준, 이 말이 가리키는 것은 앞에 7절부터 13절에 서술된 구원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뒤에 나오는 선포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을 언급하며 그 대상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를 가리키고 있음을 명시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레미야는 북이스라엘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15절은 그 날 그 때를 서술하여 특정한 시점을 가리킵니다. 이 시점은 중복해서 나올 뿐 아니라, 동사보다 앞에 배열되어 기록되었습니다. 계속해서 다윗을 위해 나타날 공의로운 가지에 대해 말합니다. 다윗에게서라고 번역되었지만 다윗을 위해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일반적으로 다윗의 혈통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구약에서 포로기 이후에 다윗의 후손이 왕으로 등극한 경우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싹이 나다는 가지와 동일한 어근입니다. 다시 말해, 예레미야는 15절에서 두 차례나 새롭게 나올 싹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표현이 예레미야 23장 5절에서 의로운 가지로 기록되었습니다. 본문 15절에서 가지는 공의라는 명사, 즉 형용사와 명사의 결합이 아닌, 명사와 명사의 결합으로 나옵니다. 이것은 가지의 합법성을 의미하기보다는 가지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본문에서 공의로운 가지는 공의로운 행위를 하는 가지를 의미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풀이는 이 가지가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실행해야 한다는 것과 연결이 되어집니다. 16절은 그 날에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그 날은 공의로운 가지를 통해 정의와 공의가 실행되는 날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정의와 공의가 실천되는 날에 유다와 예루살렘은 회복될 것이며, 예루살렘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23장 6절에 이와 동일한 명칭을 사용합니다.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말씀하죠. 다만 두 본문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23장 6절 말씀이 이 타이틀을 통치자라는 인물에 적용한다면, 본문 16절 말씀은 예루살렘에 적용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다윗의 후손이라는 출신보다 정의와 공의라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죠. 본문 17절에서 18절까지는 끊어지지 아니하리라를 반복하지만, 서술의 대상이 왕과 제사장으로 나뉘어 나온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저자는 왕이 다윗에게서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말하지만, 포로기 이후에 다윗의 후손이 왕으로 등극한 선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와 달리 레위인 제사장은 성전 재건 이후에 이스라엘 사회와 정치적인 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18절은 레위인 제사장이라는 표현을 동사보다 앞에 배열하여 강조하고 있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으며, 포로 귀환 이후에 예루살렘 성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것처럼 그곳에서 활동하는 제사장의 중요성도 더욱 부각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왕의 존재는 더욱 희미해졌지만, 제사장은 유대 사회를 대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레위인 제사장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예레미야가 많은 경우에 제사장 그룹과 충돌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상반된 기본적 경향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19절은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을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절 이하에는 언약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언약을 체결하다 보다 오히려 언약을 깨뜨리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20절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은 천지 창조와 연결된 질서를 가리키는 것이죠. 주목할 것은 이 질서를 깨뜨리는 주체로 2인칭 남성 복수, 즉 너희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너희가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밤과 낮의 때를 사라지게 한다면, 이러한 의미가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죄는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어서 저자는 수동태를 사용하여 다윗의 언약과 제사장의 언약도 깨질 수 있다고 21절에서 선언합니다. 이를 통해 본문은 역설적으로 밤과 낮의 질서가 깨질 수 없는 것처럼, 다윗 및 제사장과 맺은 언약도 깨질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또, 다윗의 자손과 레위인은 번성하게 되리라고 약속하며 이스라엘 조상에게 주어진 여호와의 약속을 특정 인물과 집단에 적용합니다.

끝으로 예레미야 33장에서 중심 메시지는 7절과 11절, 그리고 26절의 말씀입니다. 이 구절들은 전부 구원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을 보시면,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리고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합니다. 마치 다윗의 후손 중에 다스릴 자가 나지 않을 것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 역시도 핵심은 그 뒤에 나오는 내가 그들을 돌아오게 하고 불쌍히 여긴다는 말씀, 구원의 메시지가 중심인 것이죠.

때로는 자녀들이 부모님들을 화가 나게 할 때가 있기 마련이죠. 그럴 때, 자녀들을 혼내시면서, 때로는 원치않게 격한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그게 아니죠. 부모의 마음은 자녀에게 더 잘해주지 못해서 항상 안쓰러운 마음일 것입니다. 본문 26절이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지만 마무리에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돌아오게 하시는 그 사랑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연세가 아무리 연로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우리도 자녀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날마다 점점 더 하나님을 닮아가고 그 사랑을 깊이 깨닫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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