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렘 36:1-19

◎본문: 렘 36:1-19

◎개요

1-8절 말씀을 기록하라

9-19절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반응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8절까지는 말씀을 기록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고, 9절부터 19절까지는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반응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은 요시야 왕의 아들 여호야김 제 사년을 말합니다. 여호야김은 요시야의 아들이죠. 요시야와 여호야김 사이에는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재위했던 여호아하스가 있었습니다. 그는 애굽으로 끌려갔기 때문에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야김 통치 제4년은 주전 605년, 604년을 가리킵니다. 고대 근동의 역사에서 주전 605년, 604년은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주전 605년에 바벨론은 갈그미스에서 앗수르와 애굽의 연합군을 격퇴했으며, 직후에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왕으로 등극했고, 애굽을 정벌하기 위해 진격했습니다. 여호야김이 친애굽 태도를 유지한다면, 바벨론과의 일전을 각오해야 합니다.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두루마리 책을 취하라고 2절에서 명령합니다. 여호와는 예레미야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는데, 그 기간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인 것이죠.

내가 네게 말하던 날이란 것은 예레미야 소명 시점을 가리킵니다. 만약 예레미야 1장 12절을 토대로 예레미야의 활동을 주전 626년으로 잡는다면, 본문은 20년이 넘는 기간을 가리킵니다. 내가 네게 일러준 모든 말은 예레미야가 지금까지 받은 모든 말씀을 기억해야 함을 의미하는 듯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예레미야가 기록한 내용은 무엇인지 불분명하죠. 그러나 3절은 기록 내용의 핵심을 암시합니다. 행여나라는 부사가 번역되지 않았지만 그대로 해석한다면, 행여나 유다 가문이 내가 심사숙고한 끝에 그들에게 내리려 한 모든 재앙을 듣는다면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 저자는 이스라엘이 듣는 것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비판한 것이죠. 본문에는 재난과 악함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모두 동일한 단어의 번역입니다. 이것을 통해 본문은 이스라엘의 악한 행위가 여호와의 재난을 불러왔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죠.

여호와가 내릴 재앙을 피할 자는 없습니다. 이에 저자는 생각하다라는 분사를 사용하여 재앙을 내리기를 심사숙고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예레미야는 스스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불러 그에게 기록하게 했다고 4절에서 말씀하죠. 이는 예언서의 서술 배경을 보여주기에 중요합니다. 이것은 예언자와 예언서 저자가 다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예레미야서에서 중요하게 관찰되며, 무엇보다 예레미야가 애굽으로 끌려갈 때 동행한 인물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룩에게 불러주는 대로 기록하고 또 낭독하라고 명령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붙잡혔기 때문에 낭독할 수 없다고 하죠. 이것은 감금의 의미라기보다는, 19절과 26절 말씀을 고려할 때, 감시를 받아 행동에 제약이 있다는 뜻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집에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날은 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성소에 모여 있으므로 이 금식은 개인 금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금식을 가리킵니다. 바룩에게 금식일에 성전에서 낭독하라는 명령은 예레미야 26장에서 예레미야가 순례절에 성전 앞에서 선포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룩이 낭독한 결과를 7절에서 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라고 서술합니다. 7절에서도 3절과 마찬가지로 행여나라는 단어가 빠져 있는데, 행여나 혹시 그들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기 위해 엎드릴 수 있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이 간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는 문장은 3절에 언급된 악한 길에서 돌이키리니 라는 문장과 동일합니다.

여호와의 노여움과 분은 3절에 언급된 내가 심사숙고한 끝에 그들에게 내리려고 한 모든 재앙을 가리키는 것이죠. 8절 말씀에 바룩은 예레미야가 명령한 대로 여호와의 성전에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낭독합니다. 본문에 언급된 용어는 바룩이 예레미야가 말한 모든 것을 기록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죠. 1절에 여호야김 제4년을 언급했다면, 9절은 여호야김 제5년 9월을 서술하며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야김 5년은 아마도 주전 604년이었을 것이며, 유대력 9월은 태양력으로 11월, 12월입니다. 9월에는 소위 유대 3대 절기가 행해지는 시기는 아니기 때문에, 금식을 선포했다는 것은 나라에 큰 위기가 닥쳤음을 암시하는 것이죠. 주전 604년에는 바벨론이 애굽으로 진격하는 과정에 있었으며, 바벨론은 자신들의 뜻에 반기를 드는 나라를 정복하며 나아갔습니다.

풍전등화라고 하죠.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것은 유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9절 하반절에 예루살렘 모든 백성이 여호와 앞에서 금식을 선포한지라라고 말씀합니다. 금식을 선포하는 주체는 둘로 나옵니다.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그리고 유다 성읍들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입니다. 이들은 각각 6절에 말씀하는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백성과 유다 모든 성읍에서 온 자들에 상응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금식 선포는 바룩의 낭독 이후에 나오는 선포라는 점에서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보여줍니다. 이는 회개의 모습으로 간주되며,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은혜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게 합니다. 본문에 사용된 동사 중 의도적으로 낭독하다, 선포하다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나옵니다. 바룩이 낭독하다와 금식을 선포하다는 동일한 단어인데, 이는 여호와의 말씀 낭독에 대한 긍정적 반응을 강조한 것입니다.

10절은 바룩의 말씀 낭독을 구체적으로 서술합니다. 그는 성전에 있는 새 문 어귀 곁에 위치한 그마랴의 방에서 말씀을 선포하는데,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장소였을 것이라 추정하죠. 그마랴는 서기관인 사반의 아들이었으며, 그도 서기관이었습니다. 바룩도 서기관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두 서기관이 서로 친분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사반의 손자요 그마랴의 아들인 미가야를 기술하는데, 그는 바룩의 말씀을 들은 자입니다. 13절에 그는 말씀을 듣고 궁으로 내려가서 서기관의 방으로 가서 바룩이 선포한 말을 전했습니다. 미가야의 이야기를 들은 자들도 서기관으로 나오며 모두 고위 관리였습니다. 이들은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어 낭독한 두루마리를 가지고 와서 낭독하도록 요구했고, 바룩은 그 명령대로 행하였습니다. 16절 이하는 바룩의 낭독을 들은 우두머리 서기관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놀랐다고 말씀하죠. 그러나 이 표현은 예레미야 36장 24절 말씀에 표현하듯이, 두려워하다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바룩의 낭독이 예루살렘 심판을 주제로 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바룩의 선포는 임의로 기술한 것이 아니고 여호와의 말씀이며, 바룩은 그것을 기록하고 낭독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바룩의 이야기를 듣고 고관들은 바룩에게 예레미야와 함께 숨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런 점에서 고위 서기관 집단은 바룩과 예레미야에 대해 대단히 우호적이지만, 다른 집단은 그들에 대해 적대적입니다. 무엇보다 저자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고 기록한 예레미야와 바룩이 숨어야 함을 보여주며,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숨겨지고 있음을 비유적으로 묘사합니다.

바벨론의 1차 침공 이후 여호야김이 주님 앞에서의 금식을 선포했고, 그때 바룩이 예레미야에게 전한 주님의 말씀을 또 낭독합니다. 이번에는 일단의 관리가 그 내용에 긍정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문제는 회개의 지속성과 삶으로의 표현입니다. 이후 계속된 주님의 경고와 결과 사건을 보면 백성과 관리의 금식은 단지 상황 모면을 위한 임시 방책일 뿐이었습니다. 주님이 보고 싶은 것은 그들 생각의 돌이킴이 삶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신앙은 지속성의 요소를 수반한 주님과의 관계와 삶이기에 신앙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단지 상황 모면을 위한 임시 방책으로 주님을 찾거나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리고 우리의 삶에서 표현되어야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생각의 돌이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에까지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주님의 원하심을 조금이나마 채워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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