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37:1-10

◎ 본문: 렘 37:1-10
◎ 제목: 위선적 종교 행위와 참된 경건

1. 본문 개요
    a. 37:1-5           표리부동한 시드기야의 행동
    b. 37:6-10           유보될 뿐 반드시 성취될 심판

2. 관찰
    a. 1절: 바벨론이 세운 왕 시드기야
    b. 2절: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시드기야
    c. 3절: 예레미야에게 기도요청을 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시드기야
    d. 4-5절: 애굽 군대의 개입으로 후퇴하는 바벨론 군대
    e. 6-8절: 바벨론 군대가 다시 돌아 올 것을 예언하시는 하나님
    f. 9-10절: 바벨론에 의해 피할 수 없는 멸망을 맞이할 것을 선언하시는 하나님

3. 적용
    오비이락이라는 고사성어를 잘 아시지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서로 인과관계가 없는 우연히 일어난 일이지만, 그 속에서 연관성을 찾으려는 습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필연일 때가 있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주의 일하심은 ‘우연’으로 보이지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는 거죠.

    그러나 우리가 만약 우리의 신앙, 기도의 응답을 ‘우연’으로만 치부해 버린다면 그것은 자칫 ‘위선적 종교 행위’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연히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대해 긍정적인 결과를 경험하게 되었다면 참 감사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고민과 질문은 남는다는 거죠. 왜냐하면 자칫 ‘요행’에 기대는 기복적 신앙이 될 수 있게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한 대로 잘 되면 하늘 위로 올라갔다가, 또 안 풀리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을 ‘참 경건’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시간적 배경이 나옵니다. 바로 시드기야가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다 왕으로 세워진 때입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의해 왕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바벨론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습니다. 만약 조공 바치기를 거부한다면 바벨론은 유다를 가만 두려 하지 않았겠지요. 이쯤 되면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인정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2절은 여전히 여호와의 말씀을 거절하고 있다고 기록합니다.

    말씀으로 달래도 안 되고, 경고해도 안 되고, 심지어 전쟁으로 징계해도 안 됩니다. 이미 두 번에 걸친 침공으로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고집을 내려놓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도 답답할 노릇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이런 남 유다의 모습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맞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다시 한 번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심에 두는 죄인들은 결코 그 ‘중심’을 바꿀 리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절대로 죄를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기까지 해야 했을까요? ‘저절로’ 회개하는 것은 없다는 겁니다. 죄로 인하여 사람이 망가지고 엉망이 되는 것에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죄의 어리석은 고집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결국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를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매 순간 죄를 죽이고,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는 삶이 우리에게 요청됩니다.

    그런데 이 시드기야라는 왕은 참 낯짝이 두껍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은 죽어라 듣지 않으면서, 위기의 상황이 되니까 어떤 행동을 취합니까? 3절에 예레미야에게 제사장 등, 종교 지도자들을 보내어서는 오기를 청합니다. 그리고는 예레미야에게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종용합니다. 왜 기도를 부탁합니까? 지금 나라가 위기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바벨론의 3차 침공이 시작된 것 같습니다. 그러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한 겁니다. 지금 예레미야는 옥에 갇히지 않은 자유의 신분인 것 같습니다. 백성들 사이에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니까요. 자유롭게 풀어주고는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대신 시킨 겁니다. 오늘 본문 상으로 볼 때에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의 명령대로 기도를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부탁하자 마침 이집트에 요청한 원군이 움직여서 바벨론군이 퇴각을 합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은 시드기야 왕과 백성들이 회개한 결과일까요? 아니면 오비이락일까요? 이후 시드기야와 백성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일단 오늘 본문 어디에도 ‘시드기야 왕’ 자신이 회개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의 침공 때, 본인이 성전으로 나아가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기도 부탁했다는 것 말고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주를 경외함 없이 그저 기도요청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했을 분인 겁니다.

    참 회개와 경건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이집트의 원군이 온 것은 마치 요나가 주를 피해 도망갔을 때 잠시 순풍이 분 것에 불과합니다. 위선적 경건의 모습에 긍정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 뿐이라는 거죠. 결국 그 위선은 돌이킬 수 없는 오만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회적 경건의 모양’을 ‘참 신앙’으로 착각히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의 신실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와 여러분이 지속적으로 이 새벽 시간을 깨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은 ‘참 신앙’의 증거입니다. 기도 중에 응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하지만 응답이 더딘, 긴 호흡으로 기도해야 하는 기도 제목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 응답 안 된다고 새벽기도 안 나오실 거 아니잖아요? 그것이 바로 주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안에서의 ‘신실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경건’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그 바른 참 경건의 자리에 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6-10의 말씀을 통해 시드기야 왕과 남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바로의 군대 덕분에 바벨론이 다 물러간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고요. 7절에 그들은 자기 땅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고, 8절에는 바벨론 군대가 다시 쳐들어 올 것을 말씀하십니다. 9절에 바벨론 군대가 떠날 것이라고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0절에는 너희들이 만약 바벨론의 군대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게 되어서 그들 중에 부상자들만 남긴다 할지라도, 그 부상자들이 각기 장막에서 일어나서 예루살렘 성을 불태울 것이라고까지 말씀을 하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바벨론에 의한 멸망’을 단언하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이 와서 도와주기 때문에 주도권이 애굽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모든 주도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징계의 도구로 이미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이 오고, 오지 않는 현상이 문제가 아니라 주인인 내가 이미 결정했으니 너희는 회개하여 내 맘을 돌이키든지 아니면 멸망 밖에는 너희에게 남은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이 새벽에 다시 한 번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에 대해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하는 일이었습니다. 언약 관계가 회복되고 언약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매 순간 누리고 경험하기를 주님은 원하고 계십니다. 단순히 내가 기도하는 제목이 이뤄지는지, 안 이뤄지는지 ‘주어지는 현상’에 일희일비 하지 말고, 묵묵히 그분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은혜를 충만히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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