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 37:11-21
◎개요
11-16절 예레미야가 갇히다
17-21절 시드기야와 예레미야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1절부터 16절까지는 예레미야가 옥에 갇히는 내용의 말씀이고, 17절부터 21절까지는 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만남과 대화 내용의 말씀입니다.
11절은 갈대아의 군대가 떠날 때를 가리킵니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서 떠났다는 기록은 5절에서도 관찰되므로, 11절 기록은 그것과 연결되어집니다. 저자는 바벨론이 떠난 이유를 말합니다. 개역개정은 바로의 군대를 두려워하여라고 번역했지만, 새번역이나 현대어 번역은 바로의 군대 때문에라며 중립적으로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파라오의 군대에 위협을 받은 으로 번역했습니다. 바로의 군대 때문에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37장은 시드기야 통치 시기에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둘러싼 것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은 주전 588년에 예루살렘을 둘러쌌고,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을 함락시켰습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10년에 아나돗 땅을 구매한 것으로 32장에 나오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고려한다면 37장의 사건은 주전 587-586년 사이에 발생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에서 떠났을 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떠나 베냐민 땅으로 가려 했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으로 가려 한 이유를 말합니다. 개역개정은 이것을 백성 가운데 분깃을 받으려고 이렇게 번역했다면, 새번역은 이것을 집안의 상속재산을 물려받을 일이 있어서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은 문중의 땅을 유산으로 받으려고 라고 번역했습니다. 분깃이라고 번역된 동사는 나누다를 의미하는 동사이지만, 여러 역본들은 분깃이나 유산이라는 목적어를 추가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베냐민 땅으로 가려고 한 이유는 32장과 연결된 듯합니다. 저자는 예레미야의 아나돗 땅 매매를 상징행위로 보여주었고, 37장은 그 이후 행동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는 베냐민 땅에서 분깃을 받으려고 갔지만, 예레미야가 베냐민 문에 도착하자 수문장인 이리야라는 사람이 예레미야를 붙잡았습니다. 이리야는 예레미야가 베냐민으로 가는 이유를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고 가는 것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예레미야가 8절에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이렇게 말한 것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예루살렘 정복을 끊임없이 이야기 했으므로, 유다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친바벨론 성향으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유다 백성의 행동은 예레미야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예언자의 선포가 백성들에게 거부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죠. 14절에 예레미야는 그들의 말에 거짓이다라고 외칩니다. 여기에 나오는 히브리어 쉐케르라는 단어는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말씀에서도 사용된 용어이며, 예레미야는 20절에 사람들이 거짓 증거로 자신을 해치려 하고 있음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죠. 이 단어는 예레미야서에서 거짓을 말하는 종교지도자들, 율법을 왜곡하는 자들, 그리고 우상을 표현하기 위해 주로 활용되었다면, 예레미야는 이 용어를 활용하여 자신을 해치는 자들을 묘사합니다.
이를 통해 저자는 거짓 종교지도자들에 휘둘리고 있는 유다 백성을 표현하죠. 14절의 그들이 듣지 아니하고 말씀하는데, 이 문장은 26장 4절의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이 문장과 연결되어집니다. 즉, 이스라엘은 반복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예언자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언자를 고관들 앞에 끌고 갔는데, 이들은 예레미야를 때리고 가두었습니다. 36장에는 예레미야를 보호하려는 고관과 잡으려는 고관이 나오는데, 본문에 등장한 이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잡으려는 고관의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예레미야의 목숨을 보장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서기관인 요나단의 집에 가두었습니다.
그의 집은 구금하는 집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표현은 다시 감옥이라는 단어와 평행하게 나옵니다. 즉, 감옥과 같다는 것이죠. 16절은 예레미야가 잡힌 지 오랜 기간이 지났음을 묘사합니다. 개역개정에는 웅덩이로 나오는데, 이는 웅덩이 집을 의미합니다. 예레미야가 고관의 집에 감금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시드기야는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서 여호와의 말씀을 묻습니다. 3절에 시드기야가 일전에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서 기도를 요청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예레미야를 공개적으로 만나지 못하고 비밀히 만나고자 하는 시드기야의 행위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레미야에게 첫 번째로 사람을 보내는 경우와 달리, 비밀리에 만날 때는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며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시드기야가 이처럼 예레미야에게 묻는 이유는 암묵적으로 예레미야가 선포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옳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시드기야가 비밀리에 접근한 이유는 예루살렘 고위 관료 중에는 반바벨론의 입장을 취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시드기야는 심판을 예언하는 예레미야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는 듯합니다. 시드기야의 물음에 예레미야는 있나이다라고 대답한 후에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예레미야는 앞서 갈대아인이 다시 와서 이 성을 쳐서 빼앗아 불사르리라 라고 말하며 예루살렘에 닥칠 사건을 예언했다면, 이제는 시드기야가 바벨론의 왕의 손에 붙잡힐 것을 선언합니다. 그런 점에서 예레미야는 일관된 입장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왕의 손에라는 전치사구를 동사보다 앞에 배열하여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웅덩이 속에 있던 예레미야에게 시드기야가 와서 주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가 주님의 뜻을 묻던 왕에게 자기를 웅덩이에서 꺼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상태로 더 있으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예레미야도 진리 증거와 타협의 평안함 사이에 갈등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구조를 요청하기 전에 심판 예언을 먼저 전했습니다. 자기 상황이 절박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결정인 것이죠. 이 결정은 순간적 용기라기 보다는 주님의 뜻을 더 중요시하던 일상적 삶의 결과로 보는 것이 옳습니다. 결국 고난에도 신실할 수 있는 열쇠는 주님과의 관계와 뜻을 따르는 경험의 축적인 것이죠. 일회적 순종보다 평범함 속에서 주님을 기억하고 의지하는 걸음이 위기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의 생활 속에서 기도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찬양하고 이것이 쌓이고 쌓여 우리의 신앙의 성숙함의 기반이 되고, 위기에서 주님의 말씀을 붙잡고 순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기억하고 평범하지만, 매일의 삶 속에서 경건생활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