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렘 38:1-13

◎본문: 렘 38:1-13

◎개요

1-6절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다

7-13절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하다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구역식구들 권면하셔서 금요기도회에 함께 나와서 기도 응답의 역사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6절까지는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는 내용이고, 7절부터 13절까지는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예레미야의 선포가 있는 후의 모습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스바댜, 그다랴, 유갈, 바스훌이 누구인지 명확히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가 5절에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을 고려할 때, 그들은 유다 사회에서 고위직에 있는 영향력 있는 집안 출신임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로 언급된 인물들도 고위직에 있음이 분명합니다. 본문에서 1절에서 맛단의 아들 스바댜와 바스훌의 아들 그다랴는 여기에서만 나옵니다. 그다랴라는 이름은 이후에 유다 총독으로 나오기도 하지만, 그는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이므로 본문에 나오는 인물과 다른 인물입니다. 셀레먀의 아들 유갈은 여기에서만 나오지만, 그는 아마도 예레미야 37장에서 셀레먀의 아들 여후갈과 동일 인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

유대 사회에는 다윗 왕가가 오래 지속되면서 소위 공직 가문이 생겨났고, 이를 통해 관료-귀족 정치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왕의 신하였지만 왕의 권력을 견제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선포를 인용하며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리라. 둘째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라. 셋째는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의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간다. 이 세 가지입니다. 두 가지는 예레미야 21장 9절에서 관찰됩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상황에서 유다의 운명을 묻기 위해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내었고, 예레미야는 이 성읍에 사는 자는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워싼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서 21장 1절에서는 시드기야의 명으로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구하러 갔다면, 본문 1절에서는 예레미야를 공격하는 상황입니다. 말기야의 아들 바스훌은 시드기야의 신뢰를 받으며 신탁을 구하러 갔지만, 지금은 예레미야의 신탁을 듣고 예레미야를 죽이려 합니다. 바스훌은 분명 예레미야로부터 구원을 기대했던 것으로 보이며, 예언자가 심판을 선포하자 예언자를 무차별하게 공격합니다. 2절은 문자적으로 갈대아인에게 나아가로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예루살렘 주민이 성문을 열고 갈대아인에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한 모습과 대조적인 묘사는 이 성에 머무는 자입니다. 그들은 성밖으로 나가지 않고, 성에 머무르며 바벨론을 대적합니다.

바벨론은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심판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고관들은 이 성이 반드시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넘어간다고 강조하며 말합니다. 여기에서 반드시 넘어가리니라는 단어는 주다를 의미하는 동사를 중복 기록하여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4절 말씀은 고관들의 고발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죽이소서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수동태이므로 죽어야 한다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여기에는 요청을 강조하는 말이 함께 기록되어 예레미야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음을 보여줍니다.

4절은 그들이 예레미야를 해치려는 이유를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하나는 이 성에 남은 군사의 손과 모든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다입니다. 약하게 하다는 본래 치료하다라는 단어가 어근입니다. 여호와 라파, 치료의 여호와, 여호와는 치료자라고도 하죠. 그런데 라파흐라고 해서 절망하다라는 뜻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저자는 여기에서 언어유희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백성을 치료하는 자가 누구이며, 절망하게 하는 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고관들은 예레미야가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아니하고 재난을 구한다며 고발합니다. 그들은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예언자라면, 평안을 구해야 함을 전제하고 있죠. 그러나 이는 여호와의 신탁을 제한하는 것이죠. 고관들의 고발에 시드기야는 어떠한 반박도 하지 못합니다.

그는 예레미야를 만나기 위해 비밀리에 행동하기도 했고,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돌려보내지 말라는 예레미야의 요청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행동하지만, 정작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자들의 요청에 자신의 의지를 꺾고 맙니다. 시드기야는 그들에게 어떠한 말도 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히게 되었죠. 이 감옥은 왕의 아들인 말기야의 구덩이로 기록되었는데, 예레미야가 과거에 고관들의 집에 갇힌 것과 비교되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를 던졌다고, 이후에 다시 한번 달아내렸다고 서술합니다. 예레미야가 더 깊숙한 감옥에 갇히게 됨을 묘사한 것이죠.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 웅덩이를 팠고, 메마른 물 웅덩이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그곳이 진창, 즉 진흙뿐이라는 서술은 물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예루살렘에 먹을 것이 없는 상태를 묘사하는데, 심지어 마실 물도 없는 상황인 것이죠.

7절 이하에서 예레미야를 구원하려는 자는 이방인입니다. 에벳멜렉으로 기록되었습니다. 히브리어 멜렉은 왕을 뜻하고, 에베드는 종을 뜻합니다. 그래서 에벳멜렉은 왕의 종을 의미하죠. 그는 왕궁의 내시로 나오는데, 이 용어는 환관을 의미하기도 하고 고위 관료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는 구스 출신으로 나오고, 이 지역은 에티오피아로 간주됩니다. 이방인이 시드기야 통치 시기에 궁중 요직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죠. 에벳멜렉은 왕에게 나아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행한 모든 일은 악하다고 탄원합니다. 예레미야를 죽이려 시도하는 것에 대한 고발이죠. 성 중에 떡이 떨어졌다고 말하며, 예레미야가 갇히 구덩이는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없는 곳이기에, 예언자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음을 묘사합니다. 시드기야는 에벳멜렉의 말을 듣고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고 명령합니다. 위기를 문제없이 즉각 해결하기 위해 왕은 30명의 사람을 동행시켰고, 예레미야는 죽음의 위기에서 다시 한번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죽이자는 고관들의 말도 들어주고, 그를 풀어주자는 에벳멜렉의 말도 들어줍니다. 과연 자신의 입장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불분명하게 왔다갔다 하는 것인지, 오히려 이 모습이 시드기야의 무능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능함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는 것이죠. 중심이 없기에 바른 판단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우리 중심의 기준으로 삼으셔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잡고 든든히 서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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