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39:1-18


◎ 본문: 렘 39:1-18
◎ 제목: 현상과 이면의 실제

1. 본문 개요
    a. 렘 39:1-18           예루살렘 함락
    b. 렘 39:11-18           예레미야 석방과 에벳멜렉 구원 약속

2. 관찰
    a. 1-2절: 시대 상황
    b. 3-7절: 예루살렘 함락과 시드기야의 종마말
    c. 8-9절: 예루살렘 성 파괴와 포로
    d. 10절: 토지 재분배
    e. 11-12절: 느부갓네살의 예레미야 석방 명령
    f. 13-14절: 예레미야의 석방
    g. 15-18절: 에벳멜렉 구원 약속

3. 적용
    근대 이후 ‘자연 과학’에 기반 한 사고방식은 철저하게 초자연적 간섭은 없고 오직 보이는 세계만을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손에 잡히는 것, 그리고 내가 경험한 세계만을 ‘참’이라고 생각하는 기반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돌아간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생각은 ‘역사’를 보는 관점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역사를 ‘사람이 만들어가는 우연의 연속’으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안전성을 ‘우연’에 맡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제시하는 ‘현상과 이면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런 관점으로 역사를 보고 판단할 때에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제시하시는 분명하고 정확한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의 마지막에 대한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1절에 ‘유다의 시드기야 왕의 제구년 열째 달’이 시간 배경으로 제시됩니다. 다름 아닌 주전 588년을 가리킵니다. 이 때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여 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그리고 2절에 ‘시드기야의 제십일년 넷째 달 아홉째 날’이 바로 예루살렘이 함락된 날인데, 이 때가 바로 주전 586년입니다. 이렇게 자세한 역사적 시점을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약 1년 6개월 동안 지속된 ‘예루살렘 성 포위’가 결국 ‘함락’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4절에 시드기야는 야밤을 틈타서 예루살렘을 벗어나 ‘아라바’로 갑니다. 그러자 바벨론 군대는 시드기야의 그의 무리들을 ‘여리고 평원’까지 뒤쫓아 추격하여 사로잡고는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끌고 옵니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갑니다. 왕궁과 백성의 집은 불살라지고, 성벽은 헐렸습니다. 성 안에 살고 있던 귀족들과 백성들은 모두 포로로 끌려가고,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들만 유다에 남겨 두어서 반란의 싹을 모두 잘라 버렸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기록은 표면적으로는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유다 백성이 고통 당한 ‘현상’을 기록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의 실제’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단죄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묵과하지 않으시고, 그에 합당한 처결을 내리셨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여러 해에 걸쳐서, 여러 번 회개를 촉구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오히려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 왕과 고관들 그리고 그 백성들이 말씀의 ‘전달자’들이 전한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오히려 선지자를 박해하고 죽이려 한 것에 대해 심판하고 계시는 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역사는 결코 사람들 간의 수평적 상호작용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지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반드시 그의 손으로 모든 상황과 형편을 장악하시고, 이끌어 가신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의 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순간, 이 장소가 바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존재하는 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을 저와 여러분에게 요청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매 순간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삼으셨다는 메시지를 전했다는 이유로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 예레미야를 구출하고 보호한 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벨론이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볼 때에는 예레미야가 지속적으로 바벨론에 대해 우호적인 메시지를 전했기 때문에 바벨론이 그를 건져 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예레미야에게 은혜를 베푸신 겁니다.

    그리고 15절 이하에는 애굽인 내시 ‘에벳멜렉’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것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이어지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앞선 38장에서 그가 웅덩이에 갇혔던 예레미야를 탄원해 살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이면에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살리는 그 행위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 대하여 보응하셨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그를 보응하셨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멸망의 심판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의는 여전히 드러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샘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심판은 언약 관계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구약의 언약은 ‘짐승의 피’를 통해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그 짐승의 피는 ‘자신의 목숨’을 상징합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관계를 지키겠다는 약속으로 언약은 체결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깬 자는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죽음의 징계’가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언약 관계의 의무가 죽음으로 이행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더불어 주님을 경외함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또한 마땅히 사랑과 신실함을 보임으로 언약 관계에 대한 의무를 다하십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으로 보호하시는 모습 속에서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보이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함은 결코 ‘표면’으로 드러나는 역사로는 평가 될 수도,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이면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허락되는 놀라운 특권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지금 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전쟁을 경험한 포로들과 그 후손들을 향한 배려입니다. 사건의 현상과 이면의 실제를 바로 보고 주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도는 성경을 읽고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전해지는 과거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또한 오늘 그분과의 만남과 관계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면의 실제’를 볼 줄 아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입니다.

    성경은 주님과 사람의 관계를 담고 있는 역사의 기록입니다. 그분에 대한 반역 심판과 그분을 따르는 자에 대한 은혜와 보호 두 가지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늘 성경을 통해 ‘약속과 성취’의 발자취를 발견하는 혜안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때에 과거에만 계시는 하나님이 아닌 지금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람의 역사, 그 이면에서 실제를 붙들고 계시는 주권자 하나님을 만나고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댓글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