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렘 40:1-16

◎본문: 렘 40:1-16

◎개요

1-6절 예레미야 석방

7-16절 유다 총독 그다랴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절부터 6절까지는 예레미야가 석방되는 내용이고, 7절부터 16절까지는 유다 총독 그다랴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레미야 40장은 바벨론 포로 무리에 섞여 있는 예레미야를 묘사합니다. 저자는 예언자가 잡혀 사슬로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고 있음을 묘사합니다. 예레미야는 라마에까지 끌려갔다가 풀려났습니다. 본문은 예레미야가 결박에서 풀려난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그에게 임했음을 보도하지만, 2절에는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 아닌 느부사라단의 발언이 나옵니다.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가 선포했던 여호와의 말씀을 인용하고, 여호와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말합니다. 저자는 예레미야 선포를 거부하는 유대인과 그것을 수용하는 이방인을 대조합니다. 덧붙여 느부사라단의 입을 통해 너희가 여호와께 범죄하고 그의 목소리에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라고 말하며, 이스라엘이 심판당한 이유를 명시합니다.

여기에서 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종종 말씀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 일이 너희, 이스라엘에게 임했다는 것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말씀이 임했다는 것과 동일한 표현입니다. 이어서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를 풀어주며 그가 원하는 곳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바벨론은 시드기야를 포로로 끌고 갔지만 예레미야를 풀어줍니다. 이는 예레미야를 선대하라는 명령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바벨론과 유대 땅 어디든지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5절은 바벨론 사령관의 추가 발언을 보도합니다. 돌이키기 전에 라는 말은 예레미야가 유대 땅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지만 아직 돌아가지 않은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레미야가 유대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예레미야를 호의적으로 대하라고 명령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예레미야는 바벨론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반면, 유대 땅은 전쟁으로 황폐하게 되었고, 그곳 거주민이 당장에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게다가 바벨론 정복으로 예레미야의 예언이 실행되었다 하더라도, 예레미야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이에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 왕이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유대 통치자로 세웠음을 알려주며 그다랴에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돌아가다라는 동사를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바벨론 사령관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를 그냥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돌아가는 길에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냅니다. 유대 땅은 전장으로 황폐하게 되었으므로 예레미야는 당장에 먹고 사는 문제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었죠. 물론 느부사라단이 지급한 양식과 선물 역시도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당장의 배고픔은 면할 수 있는 것이죠. 이후에는 스스로 먹을 것을 마련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느부사라단이 알려준 것처럼 미스바로 향하여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나아갔고, 그곳에서 남아 있는 백성과 함께 거주했습니다. 저자는 미스바에 있는 자들을 남은 자라고 규정하는데, 문자적으로는 남겨진 자를 의미합니다. 이들 남은 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빈민이며 불쌍한 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 땅으로 돌아와 그들과 함께 거주합니다.

7절의 주어는 들에 있는 모든 지휘관과 그 부하들입니다. 이들은 일차적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시드기야와 함께 도망한 자들을 가리키거나 또는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전에 도피했던 자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시드기야가 끌려갔음은 물론이고, 바벨론 왕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통치를 위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다랴가 있는 미스바로 몰려들었습니다. 전쟁을 피해 흩어진 사람들, 특별히 군인들이 그다랴에게 나왔다는 사실은 그다랴를 중심으로 새로운 유대 공동체가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추가로 본문은 그다랴에게 몰려든 자들로 이스마엘, 요하난과 요나단, 스라야, 에배의 아들들, 여사냐 등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언급된 이스마엘은 느다냐의 아들로서 이후에도 중요한 인물로 나옵니다. 특히 이스마엘은 엘리사마의 손자이며 왕의 종친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다윗 가문 출신으로 이해됩니다.

남유다 왕국에서는 다윗 가문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죠. 남유다에서도 여러 차례 왕국을 전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땅의 백성이 일어나 다윗 왕가를 유지하기 위해 힘썼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마엘은 그다랴에게로 왔지만, 그는 다윗 가문이 아닌 그다랴를 새로운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바벨론이 임명한 그다랴는 미스바로 온 사람들에게 갈대아 사람을 섬기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이 땅에 살면서 바벨론 왕을 섬기라고 설득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들을 리가 없는데, 그의 말은 예레미야의 말과 너무도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다랴는 자신이 앞장서서 미스바에 살면서 갈대아 사람을 섬기겠다고 말합니다.

10절에 섬기다는 시종들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스바에 모인 백성에게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 등을 모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느부사라단이 아무 소유도 없는 빈민에게 나누어 준 포도원과 밭을 경작하여, 그 소출인 포도주와 여름 과일과 기름을 모으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게다가 느부사라단으로부터 얻은 성읍에서 거주하라고 설득합니다. 이러한 그다랴의 연설은 바벨론 포로민에게 보낸 예레미야의 서신, 곧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이 말과 같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자들과 유대 땅에 남아 있는 자들은 유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유대 땅에 남아 있는 자들도 포로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풀어주면서 이 전쟁을 유다 백성의 죄를 그들의 신이 심판한 것을 평가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선포를 알고 있고 그 내용에 동의한다는 뜻이죠. 주님을 모르는 비유대인, 느부사라단이 언약 백성의 지도자들과 백성보다 낫다고 볼 수 있죠. 왜 유다 백성들은 이런 관점으로 상황을 보지도 않고, 예레미야, 즉 선지자의 수없는 외침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을까요? 왜 자신들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을 선택했을까요? 유다 백성들의 선택의 기준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나의 이익, 유익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 유익인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상황 유지에 더 집중했던 것이죠.

우리는 유다 백성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나의 유익에 따라 선택을 하는 것인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유익을 선택하는 것인지, 그리고 상황 유지에 집중하기 급급한 모습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점검하고, 결국 우리의 선택 기준은 하나님이 되어야 함을 깨닫고 그렇게 선택하고, 당장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시는 참 유익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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