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렘 41:1-18
◎ 제목: 안타까운 죽음들
1. 본문 개요
a. 41:1-9 이스마엘의 그다랴 암살과 또 다른 만행
b. 41:10-18 이스마엘의 암몬으로의 도주와 요하난의 애굽으로의 도주
2. 관찰
a. 1-3절: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찾아가 살해하다
b. 4-9절: 예루살렘으로의 순례객들을 술수를 써서 꾀어 살해하다
c. 10-15절: 이스마엘의 도주와 요하난의 추격
d. 16-18절: 애굽으로 도주하려는 요하난
3. 적용
악인이 득세하고 의인이 고통을 당할 때에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라는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아담 이후 아벨에서 시작한 경건한 자의 죽음의 역사가 다름 아닌 ‘인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의인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기에 너무나 힘이 드는 세상살이라는 말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성도는 어떤 관점과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1-3절은 바벨론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겨진 유대 민족을 다스리기 위해 세운 총독 ‘그다랴’가 암살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에 그다랴를 죽인 ‘이스마엘’에 대하여 ‘왕의 종친’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다윗 가문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겁니다. 이스마엘이 시드기야와 종친 관계라는 것을 밝힌다는 것은 그가 바벨론이 임명한 새로운 총독, 그다랴를 적대적으로 대할 것임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남 유다의 통치자는 다윗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이스마엘은 다윗 가문이 아닌 그다랴를 새로운 통치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진 이스마엘이 자신을 따르는 10명의 사람과 미스바로 향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10 사람은 아마도 ‘왕의 고관들’로서 그다랴와의 식사 자리에 참석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스마엘과 함께 한 열 사람은 식사 자리에서 그다랴를 암살하게 됩니다. .
바벨론이 세운 지도자가 유다의 지휘관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반바벨론 세력이 친바벨론파를 제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악인이 의인을 죽인 것입니다. 그다랴는 경건한 가문에 속한 자로서 예레미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을 경외하였습니다. 반면 이스마엘은 주의 말씀을 무시한 불경건한 자로서 암몬의 사주로 그다랴를 죽였습니다. 그 죽이는 과정에서 ‘다윗 왕조의 회복’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웠을 뿐입니다.
수많은 악인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각종 이유를 가져다 놓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악인들의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늘 발견하게 됩니다. 아담 이후 아벨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의인들의 죽음’의 역사는 죄 된 세상의 실제이고, 지금 이 시대에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믿는 자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 하지는 않는지, 또는 내가 혹시라도 그러한 자리에 서 있지는 않는지를 늘 돌아보고 헤아려보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그다랴를 죽이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은 것 같습니다. 4-9절은 그다랴와 함께 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는 잔인한 현장을 보도합니다.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죽인 시점은 아마도 ‘축제일’을 앞두고 있었기에 ‘80명’의 순례객들이 예루살렘을 향하는 중이었습니다. 이 80명의 사람들은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성전으로 나아가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묘사에 따르면 5절에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은 베벨론에 의해 점령당하는 수치를 경험한 성전을 상징하는 모양새입니다.
이스마엘은 멸망당한 북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예배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을 향하는 경건한 사람들 80명에게 해를 가합니다. 처음에 그들에게 접근할 때는 미스바에서 영접하러 나오면서 울었다고 6절에 말합니다. 그들을 기만한 겁니다. 그리고는 ‘함께 그다랴에게로 가자’고 권하여 그들을 미스바로 인도합니다. 미스바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관문이기에 지나가야 만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인도하고는 돌변하여 다 죽여버립니다. 아마도 자신이 한 행위가 들통나지 않게 하려는 임막음이었을 겁니다.
이스마엘은 그다랴에게 위임된 남은 모든 유다 백성들을 사로잡아 암몬 땅으로 도망가려 하였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일어 너무 커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다랴만 죽이려 했는데, 그와 함께하는 측근들과 바벨론 군사까지 죽였고, 엉겹 결에 80명의 순례객들까지 죽이고 말았습니다. 마치 눈덩이가 굴러가 점점 커지 듯 죄가 죄를 끊임없이 낳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경건한 그다랴를 죽이려는 생각을 접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고, 더욱 악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죄가 더 커지기 전에 회개로 죄의 고리를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죄는 ‘세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틈을 주면 거듭 죄 짓는 인간을 점령하고 파고들어 더 큰 죄를 짓게 만들기 마련입니다. 매 순간 스스로를 돌아보고, 죄에게 지지 않고 회개함으로 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승리하는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다랴는 멸망한 유다 백성이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을 따라서 주께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는 악인의 행동으로 인해 희망의 불씨가 꺼져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마엘의 행동’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이지만, ‘아직’ 예수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는 한 끊임없는 영적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음을 말이지요. 착각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관계 안에 있는 ‘성도’라 할지라도 아직 어둔 세상 속에 있고, 바른 신앙도 핍박을 초래하거나 심지어 순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다랴의 죽음을 통해 발견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지만 의문은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불의를 막지 않으시고 회복의 불씨마저 꺼지는 것을 놔두셨을까 하는 물음표 말입니다. 그다랴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주님이 실패하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다랴의 죽음을 통해 더욱 깊은 곳에 숨어 있었던 유다의 죄를 더 드러내시고, 심판은 더 분명해 지는 과정을 보여주신 겁니다. 실제로 그다랴의 암살 사건은 바벨론의 입장에서 좌시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이미 남 유다는 주전 586년에 멸망했지만, 바벨론은 이 사건 때문에 4년 후인 주전 582년에 다시 침공하여 다시 포로 사건이 발생을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악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나게 하여서 결국은 그 악을 멸하십니다. 불의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의 방식대로 일하심을 우리는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 가운데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믿음의 눈’과 ‘신실한 인내의 삶’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을 통해 죽음이 승리하는 역설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의 가르침에 경청해야 합니다. 세상의 악함에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결코 의인의 고통을 외면치 않으십니다. 사람이나 악의 뜻에도 굴하지 않고 구원의 뜻을 이루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의 눈으로 늘 주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