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42:1-14

   
◎ 본문: 렘 42:1-14
◎ 제목: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1. 본문 개요
    a. 42:1-6           예레미야를 찾아간 백성들
    b. 42:7-14           예레미야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2. 관찰
    a. 1-3절: 여호와의 말씀을 의뢰
    b. 4절: 하나님께 묻기를 수락
    c. 5-6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재확인
    d. 7-9절: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 백성들을 모음
    e. 10-12절: 지금 있는 곳을 떠나지 말 것을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f. 13-14절: 순종하지 않을 때 벌어질 일에 대한 경고

3. 적용
    한국 교회의 특징 하면 새벽기도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참석하고 있는 이 시간 말이지요. 새벽 기도는 다른 나라 교회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열심이고, 저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순히 새벽을 깨워서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과연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그러한 점검 없이 그냥 여기에 나아온다면,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새벽기도에 참석하고 있는 이 행위 자체를 의지하면서 ‘나는 평안할 것이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겁니다. 귀하고 소중한 신앙의 모습이 자칫 그 행위 자체를 의지하는 그릇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함으로서 참으로 주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꼭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종교행위’가 아닌 ‘신앙생활’이 되는 겁니다.

    그다랴를 암살한 무리들을 진압한 요하난을 중심으로 한 유대 지역에 남아 있던 백성들은 예레미야를 향해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요청하고, 어떤 말씀이든 순종하겠다고 합니다. 2절에 요하난과 그의 무리들은 예레미야를 향해서 하나님께 기도해 주기를 바라며, 3절에 하나님께서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요하난의 무리가 예레미야를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요청하는데, ‘당신의 하나님’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물론 이 표현은 예레미야가 자신들과는 달리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존중하려는 표현으로 사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 자신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르지 않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이런 거죠. “우리는 하나님하고의 관계가 바르지 않아서 감히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예레미야 당신은 하나님과 친하니까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습니까? 당신이 하나님께 여쭈어 주면 말씀하실 테이니 물어 봐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뭐든지 말씀하시는대로 순종하겠습니다.” 이런 뉘앙스일 겁니다.

    하지만 ‘당신의 하나님’이란 말로 요청하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예레미야는 4절에 ‘너희 하나님’이란 말로 응수합니다. 그리고 6절에 비로소 백성들이 ‘우리 하나님’으로 호칭을 바꾸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른 관계에 있지 않으면, 당연히 주님이 무슨 말을 해도 순종하겠다고 한 말도 진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영합니다. 그럼 지금 요하난과 함께 있는 백성들이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부탁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단순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주님을 이용하고 있을 뿐인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올바른 기도를 드리기 위해 우리가 먼저 점검해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해보면 됩니다. 남겨진 유다 유민들은 예레미야에게 달려와서 ‘당신의 하나님’이라 말하면서 거리를 두고, 무언가 답을 내는 신으로만 하나님을 대했습니다. 이들처럼 하나님을 도깨비 방망이를 들고 내가 구하는 대로, 원하는 답을 빨리 주시는 분으로 대우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아버지, 나의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 기울이면서 ‘나의 하나님’께 전적으로 위탁과 순종을 올려드리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늘 그러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드려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유민들이 예레미야를 찾은 지 10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아에게 임했다고 7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10절에 이 땅에 눌러 앉아 살아갈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너희를 심고 뽑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유민들은 41:17절에 애굽으로 피신하기 위해서 ‘계롯김함’이라는 곳에 머물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떠날 것을 하나님께 결제 받으려는 듯, 초조하게 예레미야의 응답을 기다리는 중인데, 그 응답이 하필이면 도망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그들의 반응이 드러나지 않지만 43장을 보시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모습을 보입니다.

    유민들은 이미 자신들의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다랴가 죽은 일은 바벨론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팔레스타인 지역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 같다는 거죠. 위험이 뻔히 보이는데 남아있으라는 것은 어리석은 조언이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분명 그들은 무엇을 말씀하시든 순종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자신들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자 자신들이 한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하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종교행위’가 되어 버립니다. 종교행위의 특징은 ‘기대가 없고 형식적’이라는 점입니다. 기대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아닌지 관심이 없고,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없으니 그분이 말씀하실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가지고 있는 답안지와 다른 결과가 나오면 으레 무시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도 기도도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을 우리 생각으로 끌어오도록 ‘조종’하는 것과 ‘기도’를 착각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다름이 없지요.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바벨론의 위협을 피할 것인가?”였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그들에게 ‘애굽으로 피난 가는 것’과 ‘피난 가지 않는 것’ 둘 중에 선택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애굽으로 피난 가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동행과 보호의 약속’을 신뢰한다면 당연히 남아 있는 것이 바벨론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확실하게 지키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하느냐, 선택하지 않느냐는 결국 ‘보이는 피난처’와 ‘보이지 않는 피난처’ 사이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보여 드리느냐, 보여 드리지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주님이 자기 뜻대로 일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시험 들었다’는 말로 포장하지 맙시다. 성도에게 어울리는 말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굳건한 관계 속에서 늘 우리에게 선한 길을 인도하신다는 믿음 가지고 오직 순종의 모습을 보일 때 비로소 ‘주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조종하려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상황에 대한 모든 주권을 이양하고 늘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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