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42:15-22

◎ 본문: 렘 42:15-22
◎ 제목: 기만이 부른 심판

8월 무더위가 시작되었습니다. 더운 여름에 몸도 마음도 건강을 유지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는 주일부터 하반기 양육 과정 신청에 들어갑니다.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는 모든 전대중앙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라며, 저를 포함하여 모든 교역자들이 양육 과정 각 과목을 최선을 다해 준비합니다. 성도님들 적극적으로 동참하셔서 모든 전대중앙교회 성도님들이 그리스도의 장선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어 더욱 주님을 잘 섬기기 되기를 축원합니다.

    신앙에 위협을 주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오만, 태만, 기만’입니다. 다 ‘만’ 자 돌림이네요.^^ 오만은 뭡니까? 반대말을 살펴보면 의미가 확 다가옵니다. 반대말은 ‘겸손’입니다. 오만은 목이 곧은 겁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이 있듯, 본인이 속이 꽉 차면 찰수록 자신을 낮추는 법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만한 사람’의 특징은 속이 비어 있습니다.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아는 척을 하고, 경거망동을 하게 되는 거죠.

    태만의 반대말을 ‘성실’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고,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성실 아니겠습니까? 그에 반대되니까 항상 그 자리에 없는 상태를 ‘태만’이라 할 수 있겠지요. 무언가 일을 맡기고 싶고, 함께 동행하고 싶은데 그 자리에 없습니다. 특히 그 ‘동행’이 주님과의 동행이라면 그 ‘태만한 영혼’을 큰일이 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쓰고자 하실 때에 준비가 되어야 하는데, 하나도 준비가 안 되면 감당할 수도 없고, 결국 그 사람에게 준비된 것은 멸망 뿐입니다.

    그런데 뭐니 뭐니해도 제가 생각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은 ‘기만’입니다. ‘기만’의 반대말은 ‘진실’입니다. 투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사람은 ‘맞는 것’에 ‘예’로, ‘아닌 것’에 ‘아니오’로 반응합니다. 숨김이 없습니다. 다른 의도가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기만’하는 사람은 늘 ‘딴 구석’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없다면 그것 만큼 비참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생은 ‘기만’하는 사람에게 속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기만’이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사람을 속이듯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불성설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속지 않으십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부패한 것이 바로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람도 속이고, 하나님도 속이려다 결국 어떻게 될까요? 맞습니다. 그 속이는 마음 때문에 자신이 넘어지고, 자신마저 속고 맙니다. 그리고 예비된 자리는 ‘멸망’ 밖에 없습니다. 화를 자초하는 거죠.

    앞서 42장 전반부에 ‘요하난’은 자신과 함께 하는 ‘유다 유민’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듣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예레미야에게 나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애굽으로 도망가기 위해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모여 있습니다. 여차하면 애굽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러한 행동 자체가 ‘예레미야’를 기망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망하는 태도였음을 우리는 다음 장인 43장을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듣겠습니다.’라고 해 놓고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예! 하나님 제가 듣는다고 했지, 행한다고는 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렇게 멋진 제안을 해주셔서 감사하지만, 저는 제갈길 가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요하난의 무리들이 보이고 있는 행동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러든지 말든지 자신이 할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42장 전반부에서 이미 애굽으로 가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임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한 번 더 경고를 반복하십니다.

    15절에 유다 유민들이 애굽으로 가서 살고자 하는 것은 ‘고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에 ‘살기로 고집하면’으로 번역된 부분의 히브리어 원어 성경을 보면 ‘놓다’라는 동사를 나란히 두 번 썼습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단어를 나란히 쓰는 것은 ‘강조’의 의미입니다. ‘애굽에 자신을 두겠다 두겠다.’라고 말하는 겁니다. 이는 곧 고집스럽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 성경은 그렇게 번역을 한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애굽으로 가려고 고집하는 백성들에게 심판을 경고하시는 겁니다. ‘내려가지 말라’는 명령만 아니라 내려갈 경우 맞이하게 될 참혹한 결과까지도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함께 전달하고 있습니다. 애굽은 결코 그들의 기대처럼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나라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16절에 나타난 대로 너희가 애굽으로 도망간다 할지라도 너희가 무서워서 피하려는 칼이 그대로 따라가서 그들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17절에는 칼과 기근과 질병이 기어이 애굽까지 쫓아가서 애굽의 보호아래 살아남겠다는 자들을 삼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곳은 피난처가 아니라 ‘무덤’이 될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 지금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해 보이는 땅이 아니라 너희 본토인 ‘가나안 땅’에 머물라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따르는 일이라는 겁니다. 계산하지 말고, 머리 굴리지 말고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청종해서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부어지는 말씀임을 마음에 새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냥 손 놓고 있으면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이 문득 문득 우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주변에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어디에 땅이라도 좀 사둬야 할 것 같고, 세상의 흐름에 영합하는 행동으로 자신이 살길을 도모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이 원하시는 선택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데 최선을 다하는 태도가 요구됩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말씀을 펴서 읽을 때마다 나에게 간절함이 있어야겠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함께 드리는 공예배 시간에 목사를 통해 선포되는 설교에 귀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들으면서 마음에는 분명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다른 사람 얘기겠지.’ 하는 태도는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게 서는 것이 답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나의 삶을 경영해 가도록 기꺼이 자신을 맡겨드리는 우리 모든 전대중앙교회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요하난을 위시한 애굽으로 도망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일면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그들이 지금까지 겪어온 상황들을 생각해 보면 또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결과로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에 닥친 재난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생생하게 보고도 어쩌면 지금 또 같은 길을 고집하고 있는 샘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하나님께서 결정을 내린 ‘바벨론에 의한 심판’을 받아들이라는 명령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머물 것인가, 내려갈 것인가’, 두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선택을 요청하십니다. 이미 예루살렘에서 겪은 일에, 이제 애굽에서 겪을 일까지 하나님의 뜻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경고하시고 예고하십니다. 그러하기에 이제 선택도,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오롯이 그들의 몫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사실 핑계할 수 없지 않습니까? 어떤 일을 막상 당하면 ‘갑작스럽다. 하나님 원망스럽다. 어떻게 나에게 미리 말씀도 안 해주시고 이럴 수 있느냐?’라고 말하지만, 자세하게 드려다 보고, 뒤돌아보면 이미 ‘전조’가 있었고요. 사람을 붙여주셔서 경고도 하셨고요. 그래서 돌이킬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셨다는 것을 깨닫는 거죠. 그래서 성도는 늘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을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의 영적 더듬이가 꺾이지 않도록, 그래서 말씀하시면 그것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심령이 부드러워져서 그 말씀을 잘 받아드리고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이것을 구하여 ‘영적 습관’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낼 수 있습니다.

    8월의 첫 날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2024년의 하반기로 접어듭니다. 상반기 동안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것은 없습니까? 지금 이 시간을 통해 ‘아! 그 때 말씀하셨는데, 내가 간과하고 있었구나.’라고 생각되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없습니까?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새벽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피할 길을 여십니다. 세상의 길을 좇지 않고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삶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지만 이미 애굽 행을 굳힌 너희들의 마음을 간파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0절 말씀이지요. 너희가 예레미야에게 우리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면 따르겠다고 말한 것은 너희 마음을 스스로 속인 것이라고 강력하게 꼬집으십니다. 이미 요하난과 함께 한 유다 유민들은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무슨 말을 해도 순종할 자들이 아니라 자기 계획에 맞는 말만 들으려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대와 다르면 하나님마저 꺾으려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새벽에 결단합시다. 우리의 기도가 내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는 자리와 시간이 되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설득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내가 설득되는 시간이 바로 ‘기도의 자리’가 되게 하겠다고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실 때, 그분은 ‘성부 하나님’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잔을 마시는 것이 두렵습니다. 하지만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모범이 바로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생명은 순종입니다. 기도하려는 마음 없는,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는 기도는 기만이고, 기망이며, 가식이고,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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