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 44:15-30
◎개요
15-19절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에 대한 반박
20-30절 예언자의 심판 선포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거룩하고 복된 주일입니다. 오늘 드리는 모든 예배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은혜를 다 받아누리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5절부터 19절까지는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에 대한 반박 내용이고, 20절부터 30절까지는 예언자의 심판 선포에 대한 내용의 말씀입니다.
15절 하반절에서 큰 무리는 모든 여인과 동격이므로, 본문은 큰 무리를 지어 서 있는 모든 여인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심판과 멸망이 있을 것이라는 예레미의 말에 수긍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15절을 시작하는 대답하다라는 단어는 반박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저자는 바드로스에 사는 모든 백성이 나와서 예레미야에게 반박하고 있음을 서술하고 있는 것이죠. 바드로스는 예레미야 44장 1절에서도 언급된 지역으로 나일강 상류 지역이라는 점에서 예레미야가 갑작스럽게 나일강 상류로 올라가서 선포했을 것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게 합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주목할 것은 아내들의 발언입니다. 아내들은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자신들의 의견을 말합니다.
그들은 다른 신에게 분향했으며 남편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방신 숭배를 아내들이 주도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남편들도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지만, 제지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은 본격적으로 예레미야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을 뜻하는 단어를 어근으로 하는 표현이 중복되어 예레미야가 말한 어떤 말도 듣지 않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는 17절 이하에 기록되었고, 17절에 하늘의 여왕을 숭배했을 때와 18절에 숭배하지 않았을 때를 나누어 설명합니다. 17절은 반드시 실행하다라고 말하며 우상을 숭배하려는 자신들의 의지를 피력합니다.
여기에는 다시 한번 말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는 16절에서 관찰되는 예레미야의 말과 대립되는 그들의 말입니다. 그들은 하늘의 여왕에 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고관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즉,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의 여왕 숭배가 오래된 전통임을 묘사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당시에 먹을 것이 풍부했으며, 복을 받고 재난을 당하지 아니했다고 묘사합니다. 그들은 하늘의 여왕 숭배가 조상으로부터 전수된 것이며 또한 복을 주었다고 서술함으로써 하늘의 여왕 숭배의 정당성을 설득하고 있는 것이죠.
18절은 하늘의 여왕을 거부하고 여호와를 숭배한 결과를 궁핍, 그리고 칼과 기근으로 서술합니다. 이들은 그 결과로 멸망을 당했다고 서술합니다. 그들의 주장은 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늘의 여왕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 드리던 것을 폐한 사건은 주전 622년 사건을 가리키는데, 요시야가 하늘의 일월성신을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들의 주장은 모두 여호와의 심판의 결과와 일치합니다. 칼과 기근은 예레미야의 심판 메시지에서 빈번하게 나오며, 멸망을 당했다는 말씀은 심판의 결과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심판의 이유를 엉뚱한 데서 찾았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대항하는 자들은 유다 멸망의 원인을 주전 622년 요시야 개혁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요시야의 개혁 이전 모습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19절은 우리라는 인칭대명사로 시작하여 주어를 강조합니다. 개역개정에는 우리라는 표현이 한번 나오지만, 원문에는 두 번 기록되어 행위자를 강조하죠. 여인들은 스스로 다양한 방식으로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고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의 형상과 같은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고 말하며 하늘의 여왕 숭배를 남편들이 모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내들이 주도적으로 숭배하고 남편들은 침묵으로 동조합니다. 그들은 그 여신의 형상대로 만든 빵을 만들어 놓고 전제를 부어 바칩니다. 그들은 유다 멸망의 원인을 여호와 숭배에서 찾으며, 종교개혁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하늘의 여왕 숭배는 17절이 보여주는 것처럼 애굽 땅에서 풍요와 복을 기대하는 모습을 반영합니다.
여인들의 반박이 있은 후에 예레미야는 다시 선포를 시작합니다. 그는 남녀 모든 무리,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언급합니다. 원문은 21절 첫 문장을 의문문으로 시작하는데, 이런 문장입니다. 너희, 너희 선조, 너희 왕들, 너희 지도자들 그리고 백성들이 예루살렘 거리에서와 유다 성읍들에서 분향하지 않았느냐? 이후에는 마치 여인들의 목소리에 여호와께서 기억을 떠올리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이는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입니다. 예언자는 가장 먼저 여호와께서 더 이상 참지 않을 것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 땅은 다시 황폐, 놀람, 저줏거리가 될 것이며, 주민들은 없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선포는 예레미야서 44장 12절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앞선 선포의 반복입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는 16절에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 아니하고에 대한 응답입니다.
게다가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와 여러 증거대로 행하지 아니했다는 10절에 나의 유럽과 나의 법규를 지켜 행하지 아니했다는 말씀에 상응합니다. 이러한 결과로 이 재난이 임했다고 말함으로써, 예언자는 여인들이 말했던 재난, 궁핍, 멸망의 원인을 설명합니다. 즉, 그것은 여호와를 섬김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섬긴다 하면서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를 어긴 까닭인 것이죠. 이로써 저자는 여호와 숭배의 본질이 분향, 전제 등에 있지 않고, 율법과 법규를 따르는 것, 순종에 있음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예언자의 선언은 성전 파괴 이후 살아가는 자들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곧 제의의 불가능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전 파괴가 율법과 법규 순종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못하죠.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 되는 것이죠. 우리는 행위로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제사로 구원을 얻지도 못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죠. 대신 참 믿음에는 항상 행위가 따라오기 마련입니다. 순종하게 되어 있고, 순종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의 순종이 그 어떠한 제사보다 낫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이죠. 오늘 주일, 드리는 모든 공예배와 함께 순종으로 드리는 삶의 예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