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48:11-25


◎ 본문: 렘 48:11-25
◎ 제목: 그모스의 나라

1. 본문 개요
    a. 48:11-17           수치를 당할 모압에게 임박한 재난
    b. 48:18-25           모압을 파멸하는 자가 오다


2. 관찰
    a. 11절: 과거 모압의 모습- 평안
    b. 12-13절: 미래 모압의 모습- 수치
    c. 14-17절: 자신을 용사, 전사라 인식하지만 결국 황폐 하게 될 모압
    d. 18-20절: 파멸하는 자의 임박
    e. 21-24절: 심펀을 면할 성읍이 없음
    c. 25절: 뿔이 잘리고 팔이 부러지는 모압

3. 적용
    오늘 본문은 계속해서 모압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입니다. 모압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적의 침략을 모르고 평안하게 살던 시절은 다 지나갔습니다. 파멸하는 자가 속히 올라와서 그 땅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며, 주변 나라들을 당혹하게 할 만큼 모압의 멸망은 혹독할 것입니다. 모압의 멸망은 분명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그것은 가능성이 아닌 확실한 미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면, 그것을 바꿀 자는 없습니다.

    본문 11절 상반절은 모압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합니다. 모압은 ‘젊은 시절’ 그러니까 그 나라가 형성될 초창기부터 평안했고, 다른 나라에 정복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11절 하반절에서는 모압의 평안을 포도주가 주변의 변화 없이 잘 숙성되어 좋은 포도주가 되는 과정으로 비유합니다. 모압은 쉽게 이야기하면 어려움을 모르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경제적으로 부국이고 군사적으로도 강국이었던 모압은 그릇을 옮기지 않은 술처럼 한 번도 외세의 침략이나 유배를 당해 본 적 없이 오랫동안 안정과 번영을 누려 왔다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평안함이 때로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를 섬기기 때문에 내 삶에 닥치는 고난이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를 믿어도 내 삶에 아무런 저항 없이 그저 평탄함이 유지되면,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괜찮아서 나의 삶을 지탱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무려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괜찮은가 보다.’라는 어리석은 생각에 까지 이르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결국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때로는 고난을 우리의 삶에 보내셔서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게 하시는 은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터널을 지나는 과정에서 나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나를 둘러싸고, 하나님의 참 하나님 되심을 고백하게 될 때에 우리는 더욱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의 여정은 결국 끊임없이 ‘내 힘으로 살 수 있다.’와 ‘하나님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두 마음의 투쟁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너도 신이 될 수 있다. 너도 주인이 될수 있다.’는 심정으로 우상 숭배를 부추깁니다. 그것을 이길 방법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를 온전케 하심을 신뢰하고, 전적으로 그 분께 맡기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기끼어 주님께 모든 것을 위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12절에 ‘그릇을 옮기지 않은 술’이 잘 익어가는 것처럼 평안했던 ‘모압’을 향해 ‘술을 옮겨 담는 사람’을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술을 옮겨 담는 것은 잘 발효된 술을 보호하기 위해 찌꺼기와 술을 분리하여 담는 과정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의 심판을 술을 옮겨 담는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그런데 단순히 술을 옮겨 담아 그릇을 비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12절 말미에 하나님께서는 술을 다 비운 그릇을 부수어 버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술을 옮겨 담듯 포로로 끌려가게 되고, 병을 파괴하듯 모암 땅에 대한 파괴가 이어질 것을 하나님께서 확정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모압을 심판하는 궁극적인 이유에 대해 13절은 ‘그모스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벧엘의 신상 때문에 이스라엘이 수치를 당했듯이, 모압은 그모스 때문에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거죠. 그모스 숭배에 취하여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압의 강함과 아르다움이 수치와 통곡으로 바뀔 날이 속히 올 것입니다. 결국 오랜 번영의 시간이 모압을 오만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새벽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자랑과 자부심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자신감을 불어 넣고 활력 있는 삶을 살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나를 무너뜨리는 우상이 또한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없어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위험합니다. 그리고 내 삶이 진짜 그렇게 흘러가게 되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모압은 그모스가 자신들에게 평안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평안은 그들이 자랑하는 용맹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숭배하는 그모스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모압이 평안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내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심판이 유예되지는 않습니다. 14-17절은 임박한 재난의 상황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14절에 모압은 스스로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군사력을 신뢰하려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실체 없는 자신감이고 자만일 뿐입니다.

    우리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부요함이 나를 지탱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백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입에 ‘하나님의 은혜’를 달고 살아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산다.’는 확신이 다가오면 ‘아멘’으로 화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삶을 ‘은혜를 사모하는 삶’으로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제가 ‘아멘’을 크게 하시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 터져 나오는 ‘아멘’의 고백이 우리를 ‘은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터치하실 때마다 크게 ‘아멘’으로 화답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18-25절은 바벨론에 의해 무너지는 모압의 각 성읍의 목록이 나타납니다. 모압의 징계는 한 성읍에만 마무는 것이 아니라 모압 전역에 걸쳐 이루어집니다. 심판을 피할 성읍은 없는 겁니다. 25절에 하나님은 결국 바벨론을 통해 모압의 뿔을 자르고 팔을 부러뜨리십니다. 힘을 완전히 상실하게 만드셨으며 모압은 이제 한 나라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압의 모습에서 다시 한 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살펴야 합니다. ‘나만은 결코 주위와는 다르고, 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결국 우리를 자만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를 끊임없는 ‘영적 어둠’으로 끌고 갑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숨어 있는 ‘우상’을 찾아내야 합니다. 만약 그것을 발견하여 부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에 의해 그것이 부서지는 날을 맞이할지도 모릅니다. 그 날에는 어떠한 것도 다시 되돌릴 수 없게 됩니다. 그 날이 오기 전에 먼저 내 삶의 우상을 걷어 내고 빛의 자녀처럼 행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심판의 날은 있습니다. 그 날에는 ‘영원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 땅에 쌓아두고 움켜쥐고 자랑하던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땅 위가 아니라 하늘 위에 보물을 쌓아두는 삶을 살 것을 주문하셨습니다. 한 순간에 사라져버릴 것들에 나의 안전을 걸어두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언가 땅에 쌓아 두는 것이 많을수록 우리의 교만의 높이는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못 보는 영적 어둠으로 우리를 둘러 쌀 것입니다. 더 많이 취하려고 애태우는 ‘우상 숭배’의 삶이 아니라 더 많이 내려놓고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그 은혜로 우리의 삶을 경영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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