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48:26-35

◎ 본문: 렘 48:26-35
◎ 제목: 애가에 담긴 기회

1. 본문 개요
    a. 48:26-28           취하게 하라
    b. 48:29-35           교만을 내려놓지 않는 모압과 그들을 향한 통곡

2. 관찰
    a. 26절: 조롱거리가 되다
    b. 27절: 조롱받는 이유
    c. 28절: 터전을 상실하는 모압
    d. 29-30절: 모압의 교만
    e. 31-34절: 탄식
    c. 35절: 징벌

3. 적용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독일어가 있습니다.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고소해하는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겪는 불행을 보면서 즐거움을 얻는 태도를 비꼬는 말입니다. ‘부끄러운 기쁨’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살펴보고 있는 모압이라는 나라는 바로 샤덴프로이데, ‘부끄러운 기쁨’에 취해있던 나라였습니다. 자기도취에 빠져서 타인을 보지도, 배려하지도 않고 고통과 고난을 모르기에 다른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오늘 살펴보고 있는 본문 48:26-35은 ‘애가’입니다. 애가는 ‘고통의 노래’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가’를 선지자를 통해 노래하게 하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심판의 고통을 깨닫고 더 늦기 전에 마지막 기회를 주시는 겁니다. 하지만 모압은 결코 이 고통의 노래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을 보고 위로하기 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며 히죽거리고 웃음거리로 삼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애가를 통한 기회’가 주어질 리는 없습니다.

    26절에 하나님께서는 ‘모압으로 취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취하게 하다’는 심판 선포의 전형적인 표현이고, 술에 취한 자는 곧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러한 징계의 첫 번째 대상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었습니다. 렘 25:27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취하여 토하고 엎드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그들의 심판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모압이 그런 처지에 놓이게 된다고 말합니다. 26절 하반절이 그 내용이지요.

    그런데 모압이 이런 심판에 놓이게 되는 이유에 대해 27절은 ‘이스라엘이 심판 받을 때에 그들을 조롱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을 마치 현장에서 체포된 도둑처럼 취급하며 조롱하였습니다. 머리를 흔들며 비아냥거릴 만큼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의미이겠지요.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한 경멸을 자신을 향한 모독으로 여기시고 이제 이스라엘을 조롱한 모압을 향해 심판을 선고하십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술 취하여 아무데나 토하고, 또 토한 것 위에 뒹구는 모습을 손가락질 하면서 안하무인이던 사람이 이제는 자신이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어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면 어떻겠습니까? 서너 배는 꼴불견이지 않겠습니까? 심판의 날에 모압의 모습이 그러할 것이라고 하나님은 예언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압의 이러한 결과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의 모든 면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부부로 몇 십년을 살아도 어떨 때에는 새로운 면을 보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상대방을 아주 적게 혹은 부분적으로만 알면서 너무도 쉽게 판단하고 비판하며 정죄하고 조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늘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삶’이 진정한 제자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매 순간 상대방은 티끌만 있지만, 나는 그보다 더한 들보를 짊어지고 산다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모압은 왜 결국 스스로 ‘취하게 되어’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까? 본문 29-30절 말씀은 모압의 ‘교만’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29절을 보시면 ‘교만’과 관련된 단어가 4개나 등장합니다. ‘자고’, ‘오만’, ‘자랑’, ‘거만’ 이상 4개의 단어입니다. 이렇게 교만과 관련된 단어를 총 동원해서 모압의 극심한 교만을 지적합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멸망, 그리고 주면 나라들의 쇠퇴와 패망을 보면서 교훈을 얻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더 교만에 사로잡혔다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렘 48:25절의 말씀처럼 그들의 높은 뿔은 잘리고 팔은 꺾일 것이며, 그들의 교만은 치욕으로 바뀔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결국 모압에 대한 심판은 이웃에 대한 연민을 잃어버린 무정하고 비정한 태도로 말미암아, 그리고 부와 성공에 취하여 자기도취적 태도로 갑질을 행함으로 맞이하게 되는 운명이라고 오늘 말씀이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향하여 ‘인내와 순종, 그리고 겸손’의 태도를 마음에 품는 것이 진정한 제자도라는 사실을 거듭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습니다. 자신들은 율법도 알고, 할례도 받았기 때문에 이방의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목이 곧은 태도를 취하다가 예수님께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욕을 들어 먹었습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경험하고 그 앞에 겸손한 사람은 하늘 무서운 줄 알고, 하나님 무서운 줄 압니다. 그 분 앞에 나는 어떠한 것도 다른 이보다 더 잘난 것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늘 겸손의 삶을 견지하게 됩니다. 그런 이들 만이 이웃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고, 결국 우리를 위로하시고 승리케 하시는 ‘주의 날’이 임할 것을 사모하며 기대할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매 순간 순종과 겸손의 삶을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러한 모압의 결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31절에 놀랍게도 통곡을 하십니다. 모압은 이웃 나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그들은 철저하게 이웃 나라의 고통을 보면서 그들과 자신을 차별하며 비웃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만의 결과 황폐해지고 재난 가운데 놓이게 될 모압 백성을 보시면서 비통해 하십니다. 비록 모압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시지만 모압에 찾아온 황폐함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 이 교만한 모압 맛좀 봐라!” 그런 태도로 인생을 대하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성품과 ‘악’은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인간의 죄는 결코 짝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즐기시는 분 또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심판’ 하실 수밖에 없습니까? 하나님의 공의의 성품 때문에 죄악을 용납하실 수 없어서 심판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심판을 즐기는 ‘사디스트’가 아니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심판 가운데에도 그 심판의 대상을 향하여 ‘통곡’하십니다. ‘애통’하시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래서 애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불어 ‘애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에게 소망이 있다는 것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애가는 ‘하나님의 기대’가 전제됩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애가를 부르는 마음으로 자신의 아들도 우리에게 주셨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대는 늘 인간의 교만과 욕망 때문에 무너졌지요. 우리는 그래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혹독한 심판 만 볼 것이 아니라 거기에 담긴 기대와 사랑’을 함께 붙들고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돌아갈 기회가 있고 피할 곳이 있다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 소중함을 늘 마음에 간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교만’을 제하는 일입니다. 교만은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교만은 우리의 귀를 닫아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끝 모를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기대’를 ‘신음’으로 만들고 살 기회마저 저버린 모압처럼 되지 말고, 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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