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50:11-20


◎ 본문: 렘 50:11-20
◎ 제목: 돌아감과 돌아옴

1. 본문 개요
    a. 50:11-16           바벨론 멸망
    b. 50:17-20           이스라엘 회복


2. 관찰
    a. 11-13절: 수치를 당할 바벨론
    b. 14-16절: 공격당할 바벨론
    c. 17-19절: 역사 해석
    d. 20절: 회복할 이스라엘

3. 적용
    역사의 도도한 흐름을 연약한 인간이 바꾸어 낼 수 있는 힘이 있을까요? 그럴 힘이 인간에겐 없습니다.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강은 그야말로 그 강줄기가 흘러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역사의 물줄기를 쥐고 원하시는 대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구원의 의지는 역사의 운명을 바꾸기까지 합니다.

    그러하기에 결코 역사는 인생이 만들어낸 결과물들의 나열일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해낸 일의 결과가 나열된 것이 ‘역사’라고 규정해 버리면 결국 우리는 ‘염세주의와 패배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애를 써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만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나 자신이 한 일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분께 집중하는 인생은 그분의 행하실 일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 가운데 나타나는 기적 같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도 그대로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구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게 ‘별명’을 하나 붙여주십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소유를 노략하는 자’입니다. 여기에서 ‘나의 소유’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신 32:9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분깃, 자기 백성, 그의 기업’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니까 바벨론은 ‘하나님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열심히 노략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매우 즐깁니다. 11절 하반절에는 그러한 바벨론의 기쁨을 ‘타작하는 송아지 같이 발굽을 구르며 군마 같이 운다.’로 표현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타작하는 송아지’처럼 날뛰었지만 이제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바벨론의 기병대는 소리를 지르며 전쟁터를 휘저었으며, 그런 모습은 적군을 겁에 질리게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어 그들이 심판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임에도 그들 스스로 뭔가 된 것처럼 도를 지나쳐 여호와께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여호와는 진노하시고, 그들이 행한 대로 갚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힘을 남용하여 유다를 약탈하며 짓밟고도 즐거워하며 기뻐하던 바벨론을 향해 큰 수치와 치욕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12절이 언급합니다. 16절에 파종하여 추수할 때가 되어도 그것을 거둘 사람들이 다 도망하여 없게 함으로 말미암아 추수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함에 이르게 될 것임을 또한 경고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는 바벨론의 과거의 번성을 기억하던 자들이 주민이 없어 완전히 황무지가 된 바벨론을 지나가면서 너무나도 변한 모습을 보면서 놀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헛 것을 본냥 장탄식을 쏟아낼 것이라고 말이지요.

    이처럼 ‘바벨론’은 황무지가 되어버리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어떻게 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온전한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17-20절의 내용이 그것이지요. 17절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가 차례로 멸망당했던 상황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앗수르 왕이, 다음에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흩어진 양’을 좇는 사자처럼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차례로 유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상황을 역전 시키셔서 과거 ‘앗수르’가 ‘바벨론’에 의해 벌을 받은 것처럼 바벨론왕과 그 땅을 벌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그와 반대로 이스라엘에게는 어떤 역사가 일어납니까? 19절에 ‘다시 그의 목장’으로 돌아가게 하신다고 합니다. 포로 귀환을 말씀하시는 거죠. ‘갈멜과 바산’은 물이 풍부한 목초지입니다. 그 곳에서 양을 기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귀환한 이스라엘을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의 통일된 이스라엘로 지칭하십니다. 19절 말미에 ‘에브라임’은 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지명입니다. 하나님은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화합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교만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채찍을 드셔서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때가 차자 다시 그 채찍으로 사용했던 국가를 벌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회복 되지요. 벌을 주시는 분도, 회복하게 하시는 분도 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다 여겨지면, 그 은혜에 늘 감사하며 늘 겸비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늘 사랑하시지만,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시기도 하시는 분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분의 징계도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성실함과 신실함’을 배워서 오직 ‘하나님 주권 신앙’을 놓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50장을 통해서 ‘바벨론의 징계’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요.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던 하나님께서 왜 다시 바벨론을 향해 채찍을 드시고, 징계 받던 이스라엘은 다시 본향으로 되돌리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본문의 행간에서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다름 아닌 ‘관계의 회복’이지요.

    철저하게 구원의 날은 하나님께서 백성의 죄를 일방적으로 용서하시고 언약을 회복하심으로 아무도 그들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무엇에 달려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돌아감과 돌아옴’입니다. 다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는 언약으로 돌아가겠다는 결단’을 백성들에게 주시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본향으로 돌아오도록’ 하신다는 겁니다. 즉,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말씀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언약 백성과 왕’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그를 통해 자기 양 떼를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서 그 땅을 회복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확증하고, 그 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가 더욱 견고해지도록 만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이 새벽에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그 관계의 회복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의 핵심은 관계 회복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시면 죄가 용서되고 이스라엘은 초장의 축복을 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언약을 지키심’에 대해 감사함으로 화답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로 나아갈 때에만 그 관계는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언약의 온전한 성취를 누리고 있는 새 언약의 백성들임을 기억하고, 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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