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51:1-11


◎ 본문: 렘 51:1-10
◎ 제목: 바벨론에 합당한 심판

1. 본문 개요
    a. 렘 51:1-6           재난의 날
    b. 렘 51:7-10           여호와의 날

2. 관찰
    a. 1-2절: 바벨론을 치다
    b. 3-4절: 전투와 심판대
    c. 5-6절: 이스라엘의 구원
    d. 7절: 세계를 취하게 하는 금잔
    e. 8-9절: 치유받지 못할 바벨론
    f. 10절: 여호와의 공의

3. 적용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계속 드러내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매우 선명하게 드러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멸망의 심판’을 행하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바벨론을 상대하여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 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자비’를 완전히 거두어버린 ‘공의의 얼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 바벨론은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심판의 자리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까? 분명 하나님의 도구로서 심판의 채찍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잘 나서 큰 제국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는 오만함’ 때문이지요. 오만한 이들은 결국 ‘전적으로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떠한 것으로부터도 건져냄을 받을 수 없는 혹독한 자리에 떨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1절에 ‘내가 멸망하는 자의 심령을 부추긴’다는 표현은 이제 곧 바벨론을 심판할 ‘심판자’를 일으켜서 그들을 칠 것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내가 타국인을 바벨론에 보내어 키질’을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타국인’은 ‘키질하는 자’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은 마치 ‘추수할 때’에 ‘키질’을 통해서 쭉정이는 날려버리고, 알곡은 남기 듯, 바벨론을 키질로 까불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합니다. 그들은 결코 ‘키’ 안에 남을 알곡이 아니라 까불려서 날아가 버리는 쭉정이 신세를 면할 수 없는 셈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징계하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 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아마도 그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의 기물들을 자신의 수도로 가지고 오는 과정에서 ‘아! 하나님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은 별거 아니구나! 우리 신이 더 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벨론을 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일으키실 겁니다. 그리고 천하를 호령하던 바벨론도 하나님 앞에서 쭉정이에 불과하기 때문에 ‘키질’을 대신할 자들을 부르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업신여긴다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인격’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 된 본성’을 얕잡아 보아서는 안 됩니다. 순식간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내가 서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언제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렇게 됩니다. 그런 생각이 혹 우리의 마음을 파고 들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상기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순간 우리 모두 쭉정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지요. 절대로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바벨론의 심판을 보면서 다소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자면 과연 이스라엘과 바벨론이 다를 바가 있느냐는 거죠. 이스라엘의 죄도 가득합니다. 5절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이스라엘과 유다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하나님을 거역하여 그들의 죄가 땅에 가득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는 회복시키면서 바벨론은 쓸어버리시는 걸까요?

    역시 5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하여 그들이 그렇게 죄가 많고 징계를 받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버림받은 홀아비’ 신세로 만들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언약의 대상이기 때문에 자비를 잊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 비해 무엇이 다를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소돔과 고모라 가운데에서도 롯을 건져내셔듯이 바벨론의 패망에 앞서 이스라엘이 귀환하도록 부르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대로 우리에게 돌려주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살아남을 인생은 없습니다. 이미 멸절되었어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의 손길을 베푸셔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시 37:24절에 ‘넘어져도 아주 엎드러지지 않음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시기 때문’이라는 시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그 백성은 넘어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당연하게 받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은혜를 하나님께, 그리고 사랑스럽지 않은 이웃들에게 돌려드리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7-10절은 바벨론의 갑작스러운 멸망에 대해 다시 언급합니다. 7절에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손에 잡혀 있는 바벨론에게 세계를 취하게 하는 금잔을 두어서 포도주를 마시게 함으로 미치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벨론의 오만과 악독을 ‘포도주에 취한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로인하여 바벨론은 8절에 갑자기 넘어져 파멸된다고 말합니다.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9절에 이스라엘은 이제 화가 하늘에 미쳤고 궁창에 달했으므로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멸망당하고, 자신들이 각기 고향으로 돌아갈 상황이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뒤 늦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 된 일임을 깨닫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선포하러 시온으로 돌아가자고 10절에 선언하면서 오늘 본문이 마무리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최후에 멸망 받을 사탄의 하수인들을 ‘바벨론’으로 묘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세우심으로 당신의 완전한 공의와 완전한 자비를 온전히 세우셨습니다. 그러하기에 태초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최후의 승리로 완성이 되었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여, 그 영원한 통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주로 시인하지 않고, 끝까지 무자비함과 오만과 독선에 선다면, 결국 마지막 바벨론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비와 긍휼의 품으로 속히 옮기는 우리들의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완성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늘 묵상하고 공의로우신 주님을 드러내는 참 성도의 삶으로 돌이키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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