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렘 51:45-53


◎ 본문: 렘 51:45-53
◎ 제목: 두 도시 이야기

1. 본문 개요
    a. 51:45-46           나의 백성
    b. 51:47-48           여호와의 날
    c. 51:49-53           바벨론에 대한 보복

2. 관찰
    a. 45절: 여호와의 진노를 피하라
    b. 46절: 소문을 두려워 말라
    c. 47절: 우상을 벌하다
    d. 48절: 온 세상이 기뻐할 바벨론의 파멸
    e. 49절: 바벨론의 멸망
    f. 50-51절: 떠나라
    g. 52-53절: 징벌과 파괴

3. 적용
    첫 인류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하게 된 계기는 ‘보이는 것’에 현혹됨이었습니다. 마귀는 하와를 향하여 ‘먹음직 도하고 보암직 도한’ 이 과일이 어떻게 너희를 죽음으로 몰겠느냐? 도리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을 하나님이 시기하셔서 못 먹게 했다고 유혹했습니다. 실로 ‘안목의 정욕’은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유혹 앞에서 마음의 중심을 잘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물은 중력의 법칙을 좇아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마음의 흐름’도 마찬가지로 ‘영적 중력의 법칙’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가장 낮은 자리에 가장 중요한 지향점을 두어서 우리의 마음이 그 곳으로 흐르도록 ‘하나의 지향성’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때에 우리의 마음은 마치 오뚜기처럼 흔들리더라도 넘어지지 않게 됩니다. 오뚜기가 무게 중심이 제일 아래 쪽에 있기 때문에 넘어뜨려도 일어날 수 있듯, 우리의 마음의 중심의 가장 깊은 자리에 언제나 ‘하나님 중심 사상’을 품을 때에 우리는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 45절에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그 중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표현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 ‘탈출’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는 관용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향하여 더 이상 ‘이 백성’이라 하지 않으시고, ‘나의 백성’이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회복한 유다는 이제 ‘여호와의 진노’의 대상이 된 바벨론으로부터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스라엘의 바벨론 탈출은 ‘제2의 출애굽’으로 정의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46절을 보면 그렇게 바벨론으로부터 나오라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소문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바벨론을 페르시아가 침략한다는 소문을 말하는 듯합니다. 이 소문을 듣고 두려운 나머지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떠나지 않으면 멸망할 바벨론과 함께 멸망하게 되는 겁니다. 결코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칠 것이라는 소문에 맘 약해지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 가운데에서 무언가 의지할 것을 자꾸만 찾게 됩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도구로서 유다를 쳤을 뿐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그들의 교육과 문화에 점령당해 버린 유다는 결국 바벨론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바벨론은 결코 의지할 대상이 못 됩니다. 도리어 어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내가 지금 혹시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무엇입니까?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말명할 것입니다. 멸망할 것 붙잡고 의지하지 않는, 그리고 영원히 망하지 않을 오직 주님만을 붙잡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47-48절은 결국에는 임하게 될 바벨론이 무너지는 날에 대한 묘사가 이어집니다. 47절에 바벨론의 멸망은 결국 ‘우상들’을 벌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한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그 우상들과 함께 멸하실 날이 온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48절은 이렇게 망하는 바벨론을 바라보면서 바벨론의 압제 아래서 신음하던 하늘 아래 모든 나라들이 기뻐하게 된다고 언급합니다.

    이러한 바벨론의 멸망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보복이라는 점을 49절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킵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죽여 엎드려 두고두고 수치를 안겨주었던 것처럼, 결국 죽임을 당하고 엎드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심판의 날이 분명히 올 것이기 때문에 결코 바벨론의 강력함이 영원할 것이라고 자만하지도 말고, 혹 바벨론에서 겪고 있는 고난과 수치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낙담하지도 말 것을 유다 백성을 향하여 당부하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커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당한 고난이 너무나 강력하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 문제에서 나를 건지실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칠 만큼 낙담이 되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고 느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결국에는 역전하셔서 높은 곳에 우리를 세우기고 높이 드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 때에 놀라운 역사가 저와 여러분의 삶에 펼쳐질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50절에 유다를 향하여 ‘예루살렘을 너희 마음에 두라’고 명령합니다. 예루살렘은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 그의 보좌, 그의 통치를 상징합니다. 그분의 도성, 그분의 거처에 마음을 향하지 않으면 마음은 다른 곳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마음을 두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몸이 바벨론 도성이 묶여 있기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마음을 예루살렘으로 기울이지 못하면 결국 지금 몸이 사로잡혀 있는 바벨론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다가 바벨론이 멸망당할 때에 같이 망해 버릴 겁니다.

    어디에 피난처를 두어야 할지 갈팡질팡 할 유다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53절을 통해 쇄기를 박으십니다. 가령 바벨론이 하늘까지 솟아오른다고 생각을 해 보자는 겁니다. 홍수가 난다면 피난처는 높은 곳에 마련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늘에 까지 닿은 바벨론을 피난처 삼는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하늘과 같은 요새라 할지라도 그것을 무너뜨릴 자를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세기에 바벨탑과 같습니다. 흩어짐을 면하려고, 하늘에까지 탑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이 탑에 마음을 두면 자신이 안전할 거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어의 혼잡’함을 보내셔서 그들의 의사소통을 막아서 결국에는 흩어버리셨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지혜로운 자는 당장 보이는 높은 곳을 피난처로 삼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있다라 사라지는 풀에 기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자는 뿌리가 깊이 내려 단단한 나무에 기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피난처와 요새는 오직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그런게 그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선택하신 방법은 자신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선택,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시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향하는 인생만이 영원한 나라에 깊이 닻을 내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새벽에 화려하지만 멸망의 길로 향하는 바벨론을 선택할지, 아니면 영원하신 왕의 보좌, 예루살렘을 선택할지를 바르게 분별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하는 방향으로의 선택만이 우리를 마르지 않는 기쁨으로 초청합니다. 그 길에만 영원한 만족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 되신, 새로운 성전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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