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시 105:12-23


◎ 본문: 시 105:12-23
◎ 제목: 나그네 된 우리를

1. 본문 개요
    a. 105:12-15           아브라함의 가나안을 향한 여정
    b. 105:16-23           가나안 땅의 기근과 요셉


2. 관찰
    a. 12-13절: 이 민족에서 저 민족으로 떠도는 나그네
    b. 14-15절: 억업을 용납치 않으시는 하나님
    c. 16-19절: 땅의 기근과 노예로 팔린 요셉
    d. 20-23절: 노예 신분에서 주인의 신분으로

3. 적용
    어제 살펴봤던 시 105:1-11절은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2-23절까지의 내용도 그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설명을 계속 이어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어제 살펴본 7절의 말씀을 제가 한번 읽어드립니다.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여기에서 ‘판단’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입니다. ‘공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2절부터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 ‘하나님의 공의’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역사를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단순히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반역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친히 그 언약을 주도적으로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언약의 성취가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아브라함은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브라함과 함께 한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습니다. 그래서 나그네로 가나안 땅에서 자리를 잡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에서는 심지어 이 민족에게서 저 민족으로 떠돌아다니며 생존을 위협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합니다.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의가 아브라함의 삶에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말입니까? 14-15절을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그들을 억압하는 것을 용납하시 아니하시고 그들로 말미암아 왕들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하셨도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지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기근으로 말미암아 애굽까지 내려갔습니다. 바로에게 사라를 빼앗길 번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로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사라를 다시 아브라함에게 돌려줍니다.

    하나님의 아브라함에 대한 평가는 무엇입니까? 그는 내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는 구약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 이 세 직분 중 하나 외는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왕도, 제사장도, 선지자도 아닙니다. 단지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를 귀히 여기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언약적 공의’입니다.

    16-23절에서는 세대를 좀 뛰어 넘어서 ‘요셉의 사건’으로 무대가 옮겨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스토리입니다. 요셉은 ‘종’으로 팔려갑니다. 쇠사슬에 매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에 대해 오늘 시편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16-17절에 잘 나타납니다. “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요셉은 ‘종’으로 팔려간 것이 아니라 ‘앞서 보내진 것’입니다. 가족들보다 앞서서 내려간 것입니다. 사실상 요셉 개인의 관점에서는 이 사건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요셉이 발에 차꼬를 차고 목에 쇠사슬이 매인 것을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는 것을 체험하여 단련하기 위함’이었다라고 말합니다. ‘언약적 공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셉은 어떻게 됩니까? 총리로 등극하게 됩니다. 애굽의 바로가 요셉을 석방해 주었습니다. 20-22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21 그를 그의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22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바로는 그의 집의 주관자로 ‘요셉’을 삼아 결국 ‘뭇 백성의 통치자’의 자리에 올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보여주신 꿈,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들과 장로들을 다스립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상황과 형편이 어떠한지에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에 개입하시고 친히 언약을 이루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은 마음일 때가 있습니다. 틀림없이 나에게 주신 ‘약속’이 있습니다. 나를 세우시겠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 발생합니다. 요셉에게 꿈으로 보여주신 것처럼 내 마음에 품게 된 ‘비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비전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내 인생의 방향은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에 대한 신뢰입니다. ‘언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 맺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계약’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언약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화살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것 같습니까? 하지만 그 화살 끝을 붙들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새벽에 내 삶에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가 가득히 부어지기를 간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 인생이 이리 저리 표류하는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우리의 믿음의 조상들도 늘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나그네였습니다. 요셉은 ‘종’으로 팔려가 ‘죄수’의 자리까지 추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평가, 내가 내 스스로를 보는 시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아브라함’은 기름부음 받은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분의 관점에서 ‘요셉’은 열방의 기업을 관리할 통치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있는 ‘시선’이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어떻게 발견합니까?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는 그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 돌아갈 땅, 소유할 기업,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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