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시 105:24-45

◎ 본문: 시 105:24-45
◎ 제목: 하나님 기억하기

1. 본문 개요
    a. 시 105:24-36           야곱 가족의 이집트 입성에서 열 가지 재앙까지
    b. 시 105:37-45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에서 가나안 땅 입성까지

2. 관찰
    a. 24-25절: 자기 백성을 번성케 하시는 하나님
    b. 26-27절: 여호와의 종 모세와 아론
    c. 28-36절: 이집트에 내려진 재앙들
    d. 37-38절: 이집트 탈출
    e. 39-42절: 광야 여정
    f. 43-45절: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

3. 적용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강력하고 대다수인 사람을 위한 하나님이라기보다는 가난하고 연약한, 극소수인 사람을 돌보시고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특히 그러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수인 ‘야곱의 가족’을 당시 대제국인 ‘이집트’라는 ‘인큐베이터’ 속으로 보내셔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십니다. 작고 연약한 자를 돌보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큰 일을 행하게 하신다는 거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힘의 논리’라고 하지요. 강한 것이 선한 것이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러한 세상의 흐름에 사실은 거슬러 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철저히 ‘약한 것을 택하여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적은 무리를 향하여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늘 기억하는 것이 바로 성도가 감당해야 할 실천입니다.

    24절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크게 번성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번성하게 하셨다.’의 전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손길을 거치기 전에는 ‘번성하지 못했다.’는 말이겠지요. 24절의 ‘대적’은 시편 105편 전체 문맥상 ‘이집트’를 의미할 겁니다. 요셉에 의해 미리 갈 것이 준비되고, 야곱의 가족 전부가 이집트로 이주해 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셀 수 없을 정도로 후손이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런데 25절에 ‘대적들의 마음이 변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많아 짐으로 말미암아 이집트 사람들이 위협을 느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하게 되고, 노예로 교활하게 다루었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언 듯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 백성인데 하나님께서는 왜 대적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속임의 대상이 되게 했는가하는 물음표가 그려진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26절은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둘러싼 이방인들의 적의와 사악한 음모들을 경험하였고 너무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민족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난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행위가 신비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신비가 ‘하나님의 대행자’의 등장으로 풀리기 시작합니다. 바로 26절에 ‘모세와 아론’의 등장으로 말이지요.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쓰임 받는 ‘하나님의 대행자’들입니다. 

    그들은 27절에 하나님의 표적을 보이고, 애굽에서 징조들, 즉 출애굽 직전까지 시행될 ‘10재앙’을 행하게 됩니다. 28-36절은 바로 그 ‘열 재앙’의 내용이 자세하게 기술되지요. 그리고 37절 ‘마침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하셔서 이집트를 탈출하게 하십니다. 37절에 ‘은 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셨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 ‘전쟁’임을 가라킵니다. 전리품을 받아 나오는 겁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전리품을 안겨 주셨습니다. 이집트 백성들은 기꺼이 내어 줍니다. 왜냐하면 38절에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9-42절은 광야에서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습니다. 메추라기에 대해서는 ‘그들이 구했다.’는 단서를 달아 놓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욕심을 부렸다는 겁니다. 실제로 그들의 이 사이에 고기가 사라지기 전에 수 만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치심을 당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광야 가운데에 그들의 욕망하는 것이라 해도 채우실 만큼 그들을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집트로부터 탈출을 시키시고, 광야에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신 이유에 대해 42절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의 거룩한 말씀과 그의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특별히 ‘아브라함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셨다는 것은 그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거는 기억하지 않으면 사라집니다. 기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맞습니다. 기록해야 합니다. 기록하지 않으면 좋은 유산을 살릴 수 없으며 잘못된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는 겁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역사를 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연약하고 소수였을 때에,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흑암 중에 빛을, 죽음의 한복판에서 생명을, 절망 중에 소망을 창조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고아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오늘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역사를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일하심과 그분의 구원의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고, 그 언약을 지키셨습니다. 언약을 기억하시고 신실하게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나라,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나라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이 없고, 나그네로 정처 없이 떠돌 그 때에 그를 열국의 아비로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을 그대로 지키셔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신음을 들으시고 구원하신 겁니다.

    이 새벽에 우리를 ‘영적 이스라엘’로 부르시고, 이제는 우리를 ‘하나님을 기억하는 자리’로 초청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양과 예배는 구원받는 자의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시는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면 어떻게 기쁘고 즐겁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찬양과 예배의 출발은 바로 그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임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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