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시 106:1-12
◎ 제목: 신앙 고백으로서의 찬양
1. 본문 개요 및 관찰
a. 시 106:1-3 찬양으로의 초대
b. 시 106:4-5 지속적인 구원을 바라는 기도
c. 시 106:6-7 공동체의 죄에 대한 고백
d. 시 106:8-12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
2. 적용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입니다. 시편에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시편 104편에 처음 사용되고, 150편까지 등장합니다. ‘할렐루야’의 찬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의미합니다. 기쁠 때는 감사와 찬양의 ‘할렐루야’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고난 중에는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낙심하지 않는 ‘할렐루야’로 더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할렐루야’의 찬양의 힘입니다.
시편 106편의 첫 마디가 바로 ‘할렐루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시편의 가장 마지막 절인 48절은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그야말로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칩니다. 할렐루야의 찬양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1절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영원성’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에, 그것은 곧 우리의 찬양의 이유가 된다는 말이지요.
시인은 그 신뢰에 대한 기반을 가지고 2절에 질문합니다. ‘누가 여호와의 권능을 말하겠는가? 누가 그의 모든 영광을 선포하겠는가?’라고 말이지요. 이 질문은 사실상 어떤 답을 기대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함과 인자함의 ‘영원성’은 곧, ‘하나님의 성설성’과 연결됩니다. 그에 반하여 인생은 어떠한 자들도 ‘영원히 선함과 인자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2절에 대한 답을 해 보자면, 당연히 ‘아무도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또한 2절의 질문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이유와 목적’과도 연결됩니다. 여호와의 권능과 영광을 선포하는 자는, 결국 그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경험한 사람이라는 거죠. 따라서 시인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의 힘과 영광을 선포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수사학적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1절과 2절을 종합해 보면, 3절의 결과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그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선포하는 사람은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비록 인생이 너무나 고달프고 고난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를 지키고, 공의를 행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향하여 복을 약속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온통 반칙과 몰상식이 넘쳐흐릅니다. 이런 세상 가운데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다름 아닌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은 은혜로 기억하시고 구원으로 돌보신다는 믿음 말입니다. 그분은 충분히 우리의 구원을 지킬 능력도, 지킬 의지도 있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신뢰할 때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떤 기도를 올려드릴 수밖에 없을까요? 바로 5절의 내용이지요.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셔서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제가 당신의 언약 백성으로서 믿음을 가지고 거룩을 지켜 나아갈 때에 택한 백성으로서의 형통함이 드러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형통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만사 형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지는 형통함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친밀한 동행’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의 ‘형통’입니다. 고난 중에도 언약을 바탕으로 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신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그 찬양은 구원을 향한 기도로 전환됩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연약함과 한계를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는 찬양을 드릴 수 있고, 찬양은 ‘하나님과의 동행, 즉 형통함’으로 우리의 삶에 응답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성실함’의 반대편에 서 있는 ‘인간의 불성실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나 혼자 모든 것을 다 해낼 수 있다고 자부하는 삶은 결코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할렐루야’의 찬양을 드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고난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새벽에 그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영원히 우리를 붙드시는 사랑을 기억하고 그 분께 나아가 찬양의 삶으로 올려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6-12절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공동체적 차원’에서의 하나님의 구원과 그 구원에 대한 찬양의 고백이 이어집니다. 6절에 시인은 우리들이 ‘우리 조상들이 범죄 한 것’처럼 죄를 지었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표현은 지나간 역사의 부끄러움을 다시 기억하면서 그 잘못을 고치고 새로워지려는 시인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인이 말하는 ‘조상들의 범죄와 같은 류의 죄’는 무엇입니까? 7절에 그것은 출애굽 당시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풍성하시고, 영원하신 인자, 즉 헤세드를 기억하지 않은 것입니다.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견고하며 실패하지 않는 사랑을 기억하지 않는 이스라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것을 신실하게 지켜내시는 하나님과 대조를 이룹니다. 결국 조상들의 ‘믿음 없음’이 지금 시인과 시인의 세대에도 동일하게 없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게 시인은 ‘공동체의 죄’를 고백한 후에 8절부터 다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8절에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한 조상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사랑의 증거로 9절에 홍해를 마른 땅, 광야를 지나감 같이 지나가게 하셨고, 10절에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셨으며, 11절에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애굽의 모든 군대를 홍해에 수장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을 드러내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12절에 이 모든 것을 증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만들어 집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바로 깨닫지 못했고,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우상 숭배에 빠지고 하나님의 언약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셨습니다. 기억하시기에 사랑하셨고, 결국에는 구원의 손길을 베푸셨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인 줄로 믿습니다. 고된 현실을 직시하고, 하나님 나라가 고된 현실 속에 임하기를 소망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분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고, 불의한 현실 속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히 임할 것을 기대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아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