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왕하 1:1-8
◎ 제목: 하나님을 경시하지 말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지 않을 것 같지만, 의외로 쉽게 저지르는 실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존귀함’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을 친근히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하나님은 무시할 수 없는 존귀한 분이시고, 모두가 의식하고 경외심으로 섬겨야 할 유일한 대상이십니다.
과학 문명에 경도된 세상은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모든 것이 이성과 합리에 의해 판단되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을 미신이나 신화의 영역에 묶어두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때로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하나님을 그렇게 대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더 이상 성도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나 성경이 통하지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적 사고 방식에 빠져 세상과 같은 시선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아합이 죽은 후’ 당시 북이스라엘의 내외 정세를 알려줍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모압의 배반’입니다. 모압은 아합이 살아 있을 당시에 북 이스라엘에 정기적으로 조공을 바쳐 왔습니다. 실제로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다윗 왕조’에 대한 문헌이나 언급은 없지만, ‘아합’의 왕조인 ‘오므리 왕조’에 대해 언급되는 외교문서와 같은 것이 토판 형태로 많이 출토가 된다고 합니다. 국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아합이었는데, 그가 ‘아람’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북 이스라엘의 국력은 쇠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를 놓칠 세라 모압은 독립을 꾀하면서 강성해지는 아람과 더불어 북 이스라엘의 대적이 됩니다.
두 번째로 아합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아하시야’가 병에 걸렸다는 것과 그에 대한 대처 방식이 묘사됩니다.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이 들었습니다. ‘아하시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붙드신다’는 의미입니다. 아하시야는 자신이 병들었다면, 자신이 이름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드신다는 사실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의 병의 문제를 맡겨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찾는 대신 ‘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자신의 병이 나을지의 여부를 묻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북 이스라엘의 정치, 외교적 상태 및 영적 상태의 심각성을 1-2절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에게 해법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또한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합니다. ‘오므리 왕조’의 북 이스라엘은 주변 국가들의 외교문서에도 이름이 남을 만큼 강력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그들의 능력이 출중해서 강력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기게 하시고 호의를 베푸신 결과였습니다. 이른 자신의 능력으로 오인하였기 때문에 북 이스라엘은 점차 몰락의 길에 들어선 겁니다.
더군다나 최악의 상황에 몰릴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함이 옳은데, 그 순간 북 이스라엘의 선택은 우상이었고, ‘바알세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바알의 세력을 꺾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수차례 보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아하시야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병들었음에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의지함에서 떠나 오만에 빠진 개인과 공동체의 결말은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그분만 의뢰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아주 작은 것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는 시작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9월의 첫 날, 주일 새벽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에 귀 기울이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내가 결정하고 있는 것에 얼마나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고 있는지의 여부는 자신 만이 압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있는지에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결정된다는 말이지요.
성도님들! 오늘 본문에 아하시야가 바알세붑에게 묻는 것과 오늘날 믿는 성도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묻기 보다는 전문가를 찾고, 문제를 해결할 다른 무언가를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내가 무엇에서 문제의 해결책을 구하고 있는가가 바로 내가 무엇을 더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는가를 결정한다는 겁니다.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는다? 그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경시하는 태도가 우리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거죠.
이제 여름이 지나가고 조금씩 가을이 다가옵니다. 하반기에는 중요한 행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추수감사주일과 행복축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년을 위해 중요한 여러 가지 사항들을 결정하고 준비해야 하는 시점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정들을 할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하나님께 엎드리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새벽기도회가 일주일에 6번 있습니다. 적어도 중직자들이라면 절반인 3번은 참석하셔서 기도의 자리를 감당해 주셔야 합니다. 금요기도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제직이라면, 교회에서 중요한 일들을 나누어 맡고 계신다면,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오셔서 기도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장로, 권사 피택되신 분들! 제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제 곧 피택자 교육이 시작될 것인데, 그 전에 ‘엎드리는 훈련’부터 하셔야 됩니다. 기도 안 하면서 어떻게 중직자가 되시겠다는 겁니까?
10월부터는 ‘태신자 전도미션’이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추수감사주일 한 주 전에 ‘가을특별새벽기도회’가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에 전대중앙교회 식구들이 계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에게 묻기 전에 먼저 주님께 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하시야는 자신의 병이 나을지 여부를 에그론 신 바알세붑에게 묻고자 신하들을 보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3-4에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하나님께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으리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 메시지를 받은 엘리야는 아하시야의 신하들을 만나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지요. 지금 자신의 운명을 여호와가 아닌 이방신에게 물음으로 지금 아하시야가, 그리고 북 이스라엘이 누구를 의탁하고 있는지 드러내고 있지요. 그리고 그런 아하시야를 막아서고 어리석은 선택을 책망하며 심판을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아하시야의 신하들은 5절에 다시 돌아오고, 아하시야는 왜 돌아왔는지 묻습니다. 그러자 6절에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한 사람이 왕께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사람을 보내느냐고 책망하면서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말을 했음을 전하지요. 그리고 아하시야는 그 사람이 누군지 인상착의를 묻고 ‘털이 많은데 가죽 띠를 띠었다.’는 말을 듣자 단번에 ‘디셋 사람 엘리야’임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 성도님들이 이런 상황까지 맞이한 아하시야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장 ‘가마’에 자신을 의탁해서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러 가야지요. 엘리야에게 가서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서 낫게 해주기를 구해야 하지요. 하지만 아하시야의 선택은 달랐음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8절까지 읽었지만, 9절 이하를 보시면 아하시야가 ‘하나님의 심판 선언’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맞습니다. 자신이 가는 대신 군대를 보냅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협박하고 위협합니다. 엘리야가 자신에게 와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는 ‘ 하나님의 대언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 세상에 임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선지자에게 나아감이 옳지요. 그런데 선지자를 오라 가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오라 가라’ 하는 것과 같은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여전히 무시하는 아하시야의 태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다른 대상을 찾는 것은 주권자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한 행동입니다. 게다가 아하시야처럼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는 행위는 더욱 하나님의 심판을 부추기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른 무엇을 찾기 전에 오직 하나님을 먼저 찾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록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훈련되어야 합니다. 평생 단 한 번도 새벽기도회, 금요기도회 안 나오다 어느 날 갑자기 ‘기도의 용사’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제자는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기도의 사람, 하나님께 엎드려 구하여 주님을 무시하지 않고 하나님을 존귀히 여기는 것은 ‘훈련의 결과’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부정이고, 삶의 기반을 허무는 미련한 행동입니다. 오늘도 말씀이 저와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도 그렇게 헛되고 거짓된 것에게 묻고 있느냐?’고 말이지요. 이 새벽에 어려움을 만나거든 주님을 찾겠다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다 하나님께 아뢰는 삶만이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는 신앙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의 자리에 나 자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드려서 오직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나의 삶을 맞춰 드리겠다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