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왕하 4:18-37

◎ 본문: 왕하 4:18-37
◎ 제목: 믿음으로 나타난 능력

내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너무나도 감사한 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그 맞이 한 감사한 일이 갑자기 사라지게 된다면 그 허탈감은 배가 될 수밖에 없겠지요. 오늘 말씀의 수넴 여인이 그렇습니다. 여인은 아들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상황에서 아들을 낳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 가정을 통해 드러날 것을 예언하면서 아들을 안겨 주었습니다.

하지만 수넴 여인은 갑자기 아들을 잃게 됩니다. 수넴 여인이 아들을 잃은 이 사건은 수넴 여인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아들이 없을 때에는 그 상황에 순응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기쁨이 되었던 아들을 또 갑작스럽게 잃게 되었으니 그 고통은 극대화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인생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최근 예기치 않은 화재나 사고로 인하여 죽음을 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의 부모 입장에서는 얼마나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들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슬픔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그런 갑작스러운 상황 가운데에서도 믿음으로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과연 고난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이지요.

오늘 본문 18-20절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아이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밭에서 일하고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간 아들이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자, 아버지는 사환에게 아들을 어미에게 데려가라고 합니다. 곧 어머니에게 도착한 아들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어머니의 무릎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이가 죽자 여인은 비통에 빠질 겨를 도 없이 갈멜 산에 있는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여인은 먼저 아이를 안고 이층 엘리사의 숙소로 올라갑니다. 아들을 엘리사의 침상에 눕히고, 다른 이들이 모르게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그 후 남편에게도 아들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길을 나섭니다. 남편에게 사환과 나귀를 요청합니다. 그러자 23절에 남편은 아들의 죽음을 모르기에 초하루도 아니고 안식일도 아닌데 왜 엘리사를 찾아 가느냐고 만류하지만, 촌각을 다투어 엘리사에게 달려갑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다른데서 찾을 수 없습니다. 여인은 아직도 아들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겁니다. 선지자를 만나기 전까지 아들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남편과 게하시의 물음에 ‘평안’으로 인사하는 그녀이지만, 결코 그녀의 현실은 평안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 끔찍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의 소망을 붙잡고 있습니다. 바로 엘리사이지요.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찾아가 아이의 죽음에 대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엘리사의 발을 안고는 원망을 쏟아냅니다. 게하시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습니다. 수넴 여인의 입장이 이해는 갑니다. 자신이 구하지도 않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주어 희망과 기쁨을 갖게 하고선 이제 와 무책임하게 죽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비통함을 토로합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지팡이를 들려보내 아이를 치료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인은 직접 가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고집합니다. 단호하게 매달리는 여인을 보고 엘리사는 결국 길을 나서게 됩니다. 절박함이 간절함으로, 간절함이 고집스런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수넴 여인의 모습에서 믿음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인은 아들의 죽음 직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거침없이 엘리사를 찾아갔습니다. 이 모습에서도 우리는 그녀의 믿음과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를 향하여 비통하게 토로하면서 아들을 얻게 했으니 죽음도 책임지라는 말 속에서도 다시 아들을 살릴 수 있을 것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엘리사가 직접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뒤로 물러서지 않는 모습 또한 수넴 여인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다시 놀라운 기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우리는 오늘 말씀에서 보게 됩니다.

엘리사는 32절에 집으로 들어가 다시 아이의 죽음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죽은 아이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한 후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기만 하면 되는 때도 있고, 때로는 우리가 할 일을 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렸던 것과 유사한 방식을 취합니다. 몸을 아이 위에 올려 입과 눈과 손을 아이의 입과 눈과 손에 마주 댔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몸이 점점 따뜻해졌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이 집으로 가지 전에 먼저 게하시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게하시가 가져간 지팡이는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엘리사가 죽은 아이의 몸에 자기 몸을 올려놓는 행동을 한 후에야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수넴 여인이 비록 아들이 죽었음에도 선지자를 향해 달려가는 ‘믿음의 소망’ 아이를 살렸습니다. 선지자를 끌어 안으며 아들을 얻게 했으니 죽음도 책임지라 말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아이들 살렸습니다. 단호하게 메달려 선지자가 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간절했던 ‘믿음의 고집’이 바로 자신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이 새벽에 우리의 인생 가운데 놓여 진 문제를 믿음으로 돌파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결국 한 여인의 믿음이 생명을 불러왔습니다. 선지자를 붙든 여인의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한 선지자의 믿음이 사건을 일으켰던 것처럼 주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과 형편 가운데에서 믿음을 보기 원하십니다.

이 새벽에 믿음을 보여드리겠다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내가 말세에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다시 오실 때에 저와 여러분의 믿음을 보실 것입니다. 믿음이 바로 고난 가운데에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야 할 ‘태도와 삶의 방식’임을 기억하고, 언제나 믿음의 소망과 용기로 주어진 삶의 문제를 돌파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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