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왕하 8:16-29

◎ 본문: 왕하 8:16-29
◎ 제목: 반복되는 배역의 역사

1. 본문 개요 및 관찰
    a. 8:16-24           유다 왕 여호람의 통치
    b. 8:25-29           유다 왕 아하시야의 통치

3. 적용
    ‘견리사의’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눈 앞의 이익이 있지만 의리를 먼저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말로 ‘견위수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고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은 ‘안중근 의사’가 좌우명으로 품었던 말로도 전해집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를 바라보면 이와 같은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일제 시대에 기독교 신앙은 ‘견리사의, 견위수명’의 정신을 실천하는 성도들로 인하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 신앙은 오히려 세상이 걱정해야 할 정도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모습은 아닌지 염려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배신하는 일들이 벌어지는 요즘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유다의 두 왕 또한 그러했습니다. 분명 남 유다를 지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배반하며 아합의 길을 추앙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아야 할 것입니다.

    여호람 왕은 ‘여호사밧’을 뒤이어 유다의 다섯째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눈에 보기에 악한 왕이었습니다. 여호람은 5년 정도를 아버지 ‘여호사밧’과 함께 섭정을 하다가 32세부터 단독으로 8년간 통치했습니다. 18절에 여호람 왕에 대한 평가는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아합의 딸’을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호람은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와 결혼하여 그들의 악행을 본받았습니다.

    정략 결혼의 목적은 더 강대한 나라를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을 기대했던 여호람 왕의 아버지 ‘여호사밧’의 바램과는 달리 결국 이 동맹은 더 악한 나라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연합’은 그 자체로 정당화 되지 않습니다.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더 큰 악을 만들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몸집을 키워서 권력을 누리는 데만 여념이 없는 뒤틀린 이합집산은 또 하나의 바벨탑 쌓기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하기에 여호람의 결혼을 통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연합은 ‘진정한 하나 됨’이 아니라 ‘야합’일 뿐이었습니다.

    더 부강하고자 결혼 동맹까지 맺었지만 여호람의 통치는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20절에 ‘에돔’이 유다의 손에서 배반하여 자기 위에 왕을 세웁니다. 그리고 22절에는 ‘립나’라는 나라 또한 유다를 배반했다고 말합니다. 유다는 이 두 나라에 대하여 반란을 진압하고자 군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간신히 도망쳐 나올 정도로 국력은 쇠약해졌습니다. 남 유다가 연합의 파트너로 선택한 ‘북 이스라엘’의 사정도 녹녹치 않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의 아들인 ‘요람 ’왕‘역시 아람의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을 당해 ’이스르엘‘로 퇴각했습니다.

    이처럼 ‘아합과 이세벨’을 중심으로 두 나라의 사이는 돈독했지만 하나님과의 사이는 좋지 못한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하나님도 그들의 나라에서 멀리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과 거리가 멀수록 하나님이 우리 눈에 작게 보이고, 그 하나님의 영향력도 허락하지 않게 됩니다. 악순환이 거듭되게 됩니다. 작은 이익을 위해 큰 대의인 하나님 신앙을 포기한 대가는 너무나 컸습니다.

    25-29절은 유다의 여섯째 왕 아하시야의 통치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 또한 ‘여호와의 눈에 악한 자’입니다. 그는 22세에 등극하여 1년간 통치하고, 예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아하시야의 모친은 그 유명한 이세벨의 딸 ‘아달랴’였습니다. 그녀의 악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하시야 역시 ‘아합의 집’의 길을 따랐다고 평가합니다. 아하시야는 아달랴의 조언을 받아 바알을 숭배하고,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했으며, 성전의 모든 성물을 바알에게 바쳤습니다.

    아하시야는 북 이스라엘이 아람 왕 하사엘과 전쟁할 때에 길르앗 라못에서 돕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 왕 ‘요람’이 아람과의 전쟁에서 당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이스르엘로 돌아왔을 때에 아하시야가 요람을 보기 위해 내려갔다고 29절에 기록하는 것을 보니 ‘남 유다’가 북 이스라엘에 완전히 끌려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함께 ‘공멸’의 길로 가고 있다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마무리 되고 있음을 보게 되지요.

    하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남 유다 왕들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유다가 하나님 안에서 보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19에 하나님께서 유다를 보전하셨다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다윗과 맺은 언약’을 기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향하여 ‘너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약속해 주셨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켜주신 겁니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배반의 시절을 보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배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붙잡아 주십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두 왕, 대를 이어 ‘바알’을 향한 집착을 보여 결국에는 패착에 이르렀습니다. 다윗의 길을 버리고 아합, 우상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악한 나라로 만들었고,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공멸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남 유다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리고 남 유다는 멸망하는 북 이스라엘보다 좀 더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대대로 지켜 주신 ‘언약의 등불’이 점점 위태로워진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하시야’ 왕 이후로 남 유다는 급격하게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게 됩니다.

    눈 앞에 당장 이익이 될 것 같아 ‘아합의 길’을 걸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길, 여호와의 길, 다윗의 길’을 지키는 ‘견리사의’의 모습을 기대하셨습니다. 하지만 결국 ‘견리망의’ 하였습니다. 당장 눈 앞의 우상이 더 이익이 될 것 같아, 참 ‘의’이신 하나님을 망각해 버린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혹시 세상 가운데, 눈에 당장 들어오는 이익을 좇아서 하나님을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은 없는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언약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얻게 된 ‘언약 백성’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붙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끝끝내 우리를 향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외면하면, 결국 손해는 우리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눈 앞의 이익으로 하나님을 내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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