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왕하 10:18-36

◎ 본문: 왕하 10:18-36
◎ 제목: 예후의 빛과 그림자

1. 본문개요 및 관찰
    a. 18-28절: 예후를 통한 바알 숭배자 심판
    b. 29-36절: 예후의 통치 평가와 통치 종결부

2. 적용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이라 평가받는 에이브러헴 링컨은 ‘누군가의 인격을 시험해 보고 싶다면 권력을 줘보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정확한 명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저 사람은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여겨서 그 사람에게 권력을 주었는데, 그러한 기대를 저버린 위정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후’라는 인물은 철저하게 우상을 척결하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마치 그의 모습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였던 엘리야의 모습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만큼 바알 숭배자들을 철저하게 심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대행자로서의 모습은 조금씩 퇴색되어가고 점점 ‘권력 의지’만을 가진 예후의 모습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후의 모습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계실까요?

    예후는 ‘아합 왕조’를 진멸하라는 사명을 받았고, 그 사명에 전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북 이스라엘의 모든 바알 숭배자들까지 척결하려고 합니다. 그 내용이 18-27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예후는 오늘 18절을 보니까 모든 백성들을 향하여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고 선포합니다. 하지만 실상 ‘바알을 많이 섬기리라’의 본 뜻은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멸할 것’이라는 계책이었음을 19절에 밝히고 있습니다. 예후가 바알을 위하는 큰 제사를 드리려 하니 바알 선지지와 제사장과 숭배자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일 것을 명령하고, 만약 불응하는 자가 있다면 살려두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그 결과 21절에 바알은 섬기는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바알 신당을 가득 매웠습니다.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을 식별하기 위해 바알 숭배자들에게 다 예복을 입힙니다. 그리고 25절에 바알에게 번제를 드리는 일이 끝나자마자 호위병들과 지휘관에게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고 명령하자, 엄청난 살육이 시작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호위병과 지휘관들의 칼에 죽임을 당해 신당 밖으로 던져 집니다. 그리고 26절에 바알 신당의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27절에 바알의 신당을 변소로 만듭니다.

    예후가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보인 조치는 매우 단호하고 기습적이었습니다. 한 사람도 빠져나갈 수 없도록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우리도 예후와 같은 결단과 과감성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분명한 목표 설정과 지혜로운 계획, 그리고 과감한 결행이 있어야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내가 내려놓고, 결단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 새벽에 스스로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내 안에 나쁜 습관이 있다면,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다시는 그것에 돌아보지 않는 결단이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더욱 거룩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내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예후는 결심을 하고 바알을 북 이스라엘 가운데에 몰아내기로 결단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28-29절의 내용을 보면 또 한 번 물음표가 그려집니다. 예후는 18-27절의 내용을 통해 ‘바알 척결’에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29절을 보니 예후가 포기하지 못한 것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은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분명하게 ‘여로보암의 죄’로 규정합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북 이스라엘의 최북단인 ‘단’과 남 유다와의 경계지역인 ‘벧엘’에 세운 것은 ‘종교적 의도’와 더불어 ‘정치적 의도’의 성격이 매우 강하였습니다. 아무리 나라가 갈라졌어도, 절기는 지켜야 한다고 백성들은 생각해서 매 절기마다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을 떠나지 않았겠습니까? 그것이 불안했을 겁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마치 출애굽 때에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는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해 낸 하나님이다.’라고 하며 사람들을 결속하려 했던 것처럼, 금송아지를 그것도 북쪽와 남쪽 두 군데에 만들었습니다.

    예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알’을 척결하는 것은 다분히 ‘아합 왕조’의 색깔을 지우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아합의 색깔을 지웠다고 판단한 예후는 ‘다윗의 길’로 행하는 하나님 유일 신앙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 이스라엘의 시조 격’인 여로보암에게서 정치적 해법을 찾은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길을 가야만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30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예후를 향하여 ‘나보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니 예후의 후손으로 4대까지 왕위가 이어질 것’을 약속받습니다. 그러나 31절에 하나님은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결국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것에만 전념하고, 백성이 불편해 할 일에 대해서는 전념을 다하지 않는 예후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을 주변에서 자주합니다. 이 경우가 그에 해당합니다. 정말 내가 열정적으로 하고 있는 일을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해 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일의 의도가 무엇이고,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사람을 만족케 하는 것인지를 늘 점검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을 향한 충성의 자신의 마음을 나누었던 예후를 보시면서 하나님께서도 결국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버리십니다. 거듭되는 아람의 공격으로 인해 결국 33절에 나타난 것처럼 요단 동편의 땅을 아람에게 고스란히 빼앗겨 버립니다. 절반의 순종을 보인 예후이기에 하나님도 절반의 축복만을 주셨습니다. 예후의 왕위를 당장 빼앗지는 않으셨지만, 4대까지만 왕위가 이어질 것이라고 하나님은 제한을 두십니다. 

    이 새벽에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순종과 전적인 충성’을 드리겠다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전부를 원하십니다. 이해타산에 따라 사람을 대하듯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언약 백성이 행할 일이 결코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께 모두 헌신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다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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