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왕하 15:1-22

◎ 본문: 왕하 15:1-22
◎ 제목: 사람의 어리석음과 하나님의 간섭

1. 본문개요 및 관찰
    a. 1-7절: 유다 왕 아사랴의 통치
    b. 8-12절: 북 이스라엘 왕 스가랴의 통치
    c. 13-16절: 북 이스라엘 왕 살룸의 통치
    d. 17-22절: 북 이스라엘 왕 므나헴의 통치

2. 적용
    오늘 본문은 한 명의 ‘남 유다’의 왕과 세 명의 ‘북 이스라엘 왕’의 통치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 명의 ‘남 유다 왕’과 세 ‘북 이스라엘 왕’ 사이에 먼저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통치 기간’입니다. ‘아사랴 왕’은 16세의 나이에 왕이 되어 오십이 년간 다스렸습니다. 통치 기간이 ‘반 백년’이 넘지요. 하지만 북 이스라엘의 세 왕, ‘스라랴, 살룸, 므나헴’은 각각 여섯 달, 한 달, 십년입니다. 살룸의 경우에는 ‘한 달’이니까 30일 동안 왕위를 지켰다가 결국 암살당하게 됩니다.

    또한 이 두 나라 사이의 차이는 ‘왕조의 변화’입니다. 남 유다는 여전히 ‘다윗 왕조’가 유지됩니다. 하지만 북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스가랴부터 므나헴까지 ‘세 왕’이 ‘세 왕조’입니다. 스가랴는 ‘야베스의 아들 살룸’에게 암살당하고, 살룸은 ‘가디의 아들 므나헴’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세습’이 아닌 ‘정변’에 의해서 왕위를 갈아치우고 있는 셈입니다.

    먼저 52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왕위를 유지했던 아사랴를 한번 살펴봅시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놓고 본다면 비교적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법 긴 시간 동안 통치 기간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남 유다의 백성들은 안정적으로 삶을 유지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절 하반절을 보시면,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았습니다. 이 말은 대체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다는 의미일 겁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 ‘고질병’이 있었는데, 이는 다름 아닌 ‘산당을 없애는 문제’였습니다. 산당을 없애지 못하자 어떤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봅니까? 맞습니다. 그곳에서 계속 제사와 분향을 드리는 것이 습관이 된 남 유다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산당을 제거하지 못한 문제는 결국 자신과 백성들이 온전히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세운 벧엘과 단의 성소, 기타 우상 산당들을 없애지 못한 문제와 같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없애지 못했을까요? ‘하나님’을 의식하기보다 ‘백성들’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의지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하는데, 민심을 달래는 일에 더 적극적이었던 것이 바로 아사랴 왕이었다는 겁니다. 아사랴 왕만 그랬겠습니까? 몇몇 하나님께 그 신앙을 인정받았던 왕들을 제외하고, 그나마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행했다는 평가를 받은 왕이라 할지라도 산당의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나님 존전 의식’이 아니라 ‘백성 존전 의식’이 그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그 분께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꾸만 사람을 의식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을 떨쳐버리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하나님 존전의식, 코람데오의 삶을 살지 못하면, 거듭하여 사람 눈치만 보는 삶을 살게 마련이라는 겁니다. 비리에 눈 감게 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에 더욱 신경 쓰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 않는 미혹의 길로 빠져 결국 멸망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아사랴는 그의 말년에 ‘나병환자’가 되어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열왕기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역대하 26:16-23절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문제가 된 것은 제사장과 레위인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의 직무인 분향단의 향을 사르는 일을 직접 하려했다는 겁니다. 제사장 아사랴와 용맹한 제사장 81명이 죄를 지적하고 성소에서 나가라고 했는데도 분향을 시도했고, 그들에게 화를 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나병으로 치신 겁니다.

    나라가 강성해 졌습니다. 그래서 교만해지지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려다 하나님께 나병을 얻어 별궁에 갇혀 살았습니다. 오래 살면 뭐 합니까? 오랜 기간 통치를 했으면 뭐 합니까?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되어 주님 눈 밖에 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새벽에 단 하루를 산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수 있도록 내 마음을 붙잡아 달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세 왕으로 넘아 가 봅시다. 반란의 연속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가장 전성기였던 ‘여로보암 2세’의 아들이 바로 오늘 본문 8절에 등장하는 ‘스가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6개월 만에 죽임을 당합니다. 아버지의 강력한 왕권의 그늘은 너무 짙었고, 아들이 그 대가를 치루었던 셈입니다. 이어지는 왕 살룸은 한 달에 불과했고, 그 뒤는 므나헴이 이었지요. 10년의 세월을 통치한 므나헴은 잔악하기로 소문난 왕이었습니다. 그가 잔악하게 된 이유는 연이은 반란이 있었고, 자신 또한 반역으로 왕권을 장악했으니 두려웠기 때문일 겁니다. 자신도 얼마든지 당할 수 있으리라 예상하니 더 잔인하게 굴었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권력의 속성은 차지하고 나면 지키기 위해 안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권력을 맘 편하게 누리는 자는 없습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약자는 더욱 가혹하게 괴롭히고 착취하며, 강자에겐 한 없이 비굴해 지는 것이 바로 세상의 ‘권력’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세속의 권력’의 속성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이른바 ‘강력한 힘이 선이다.’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남의 희생을 밟고 얻는 부요와 지위를 축복이나 성공이라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불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 인이고, 성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겸비하여 늘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기대하고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구속 역사의 드라마로 저와 여러분을 초청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는 다 알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하나님만을 의식하여 그 분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드릴 때에 하나님을 향한, 그리고 사람을 향한 바른 뜻을 추구하는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의 드라마 속 주인공으로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늘 쓰임받는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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