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곤 강도사 / 왕하 16:1-20

-설교

◎제목: 상황을 넘어 하나님을 신뢰하라

◎본문: 왕하 16:1-20

◎개요

1-5절 아하스의 통치와 평가

6-9절 아하스의 정치적 타협

10-20절 아하스의 종교적 타협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 은혜가 충만한 하루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10월의 첫날입니다. 한 달의 첫날을 주님 앞에서 시작함으로 주님께서 이 한 달을 동행하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5절까지는 아하스의 통치와 평가에 대한 말씀이고, 6절부터 9절까지는 아하스의 정치적 타협에 관한 말씀, 10절부터 20절까지는 아하스의 종교적 타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아직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이 땅에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이중 정체성을 갖고 있기에 주님의 도우심과 함께 세상의 영향력을 실제 경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즉 갈등과 선택의 연속이죠. 그렇다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크게 보고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인지, 그리고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전에 오늘 본문의 배경을 짧게 살펴보면, 유다 왕 요담, 요담의 통치 말기와 아하스의 통치 초기에 아람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동맹군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남유다를 침공했죠. 이 전쟁은 오늘 본문 중 5절부터 6절, 그리고 역대하 28장과 이사야 7장에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3세에게 예물을 바치며 원조를 청했고, 이에 대해 수락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침공으로 동맹군은 패전하게 되죠. 다메섹은 멸망했고, 북이스라엘은 갈릴리 전역과 요단 동부의 길르앗을 잃었습니다. 열왕기는 이 전쟁에서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를 의지한 데에 초점을 두었고, 역대기는 아하스와 백성의 죄를 부각하여 동맹군이 유다에 남긴 큰 피해를 하나님의 심판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아하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부정적입니다. 정직히 행하지도 않고 심지어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고, 산당에서 뿐만 아니라 산 위와 나무 아래에서까지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다고 하나님은 아하스를 평가하십니다. 아하사는 조상의 정직한 길을 걷지 않았을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왕들의 악한 길을 따랐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의 가증한 짓까지 따라 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 지나게 하고 산당에서 여전히 제사하였죠. 이렇게 해도 과연 하나님은 다윗의 등불을 끄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고 싶으실까요? 이방보다 더 이방 같은 나라에 소망이 있을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시대로 치면, 세상보다 더 세상 같은 교회도 있고, 정치꾼보다 더 악한 사역자도 있고, 교인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다 할 수 있을까요?

아마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각 교단의 총회가 얼마 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총회의 가장 어른이라고 하는 총회장, 혹은 임원들이 세상 사람들만큼도 못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아하스와 같은 면의 모습이 그들에게서 보이는 것이죠.

이방을 따라하고, 세상을 따라하고 우상을 숭배하니 하나님의 존재감은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도 없고 아예 사라져버렸습니다.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하여 형제인 나라 유다를 침략하고자 쳐들어옵니다. 이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남북이 싸울 정도로 두 나라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있는 모습인 것이죠. 하나님이 안중에 없으니 두 나라 모두 무엇을 의지합니까? 강대국을 의지합니다. 북이스라엘이 아람을 의지하니 남유는 앗수르를 의지합니다. 그리고 성전과 왕궁에 있던 은금을 예물로 주면서 개입해주도록 요청을 하죠. 아무도 승리할 수 없는 싸움입니다. 결국은 누가 이기든 이방나라가 이기는 것이고 우상이 이기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할 두 나라가 서로 강대국의 힘을 의지하는, 그래서 결국 우상이 이기게 되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지전능하신 그리고 유일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작 사람이 만든 우상을 섬기는 이방 나라를 의지하고 있는 모습은 이미 패배자의 모습이죠.

심지어 아하스는 다메섹에 가서 우상 제단을 보고 그 제단에 매료되어서 그대로 예루살렘에 만들도록 지시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만들었고 배치해놓은 제단을 자기 마음대로 재배치를 하죠. 더 많은 제사를 드리도록 성전 공간을 확대하고 큰 제단도 만듭니다. 본래 있던 놋제단은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하려고 합니다. 즉, 아하스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안전과 만족, 필요를 위해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는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세속적인 성공을 기준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강대국의 우상제단을 본떠서 만들면 자기 나라도 강해질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것은 지금 이 시대에는 더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죠. 선진국의 교회 운영 방식이나 기업의 운영 방식을 교회에 적용하여 교회가 커지면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고 말하는 교인들도 있습니다.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세상의 영향력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보았던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크게 보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보지 않고 세상만 보고 사는 사람이었고, 선진국, 강대국들의 힘과 문물, 심지어 제사까지도 다 쫓아가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강대국이 좋았고, 선진국이 좋았고, 그들을 동경했기 때문이죠.

우리는 어떠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의 영향력을 경험하지만 세상의 영향력이 없어도 그만, 있어도 그만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세상의 영향력이 틈을 타고 우리를 물들이고 주님과의 관계가 점점 작아지다가 버리게 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말씀의 아하스 왕의 시대에도 앗수르 시대에도 늘 그래왔듯이, 세상에 물들고 주님을 멀리하면, 결국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 비윤리, 비도덕, 동성애, 차별금지법, 이러한 반기독교, 반성경적인 사상과 법들이 자리를 잡고 옳다고 여기게 되는 현상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의지할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 우리가 의지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악하다고 하는 것은 악한 것이 맞습니다. 아하스의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길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평가하실지 생각하며 고민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향한 주님의 시선이, 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우리 자신을 무엇이라 평가하는지, 세상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시선과 마음에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두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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