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왕하 19:1-19


◎ 본문: 왕하 19:1-19
◎ 제목: 하나님을 경외한 히스기야


1. 본문개요 및 관찰
    a. 1-7절: 이사야를 통한 하나님의 응답
    b. 8-13절: 산헤립의 편지
    c. 14-19절: 히스기야의 기도

2. 적용
    오늘 본문의 배경은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가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둘러싼 상황입니다. 앞선 왕하 18:19-35절을 보시면, 앗수르의 산헤립이 협박을 합니다. 매우 긴박하고 엄청난 압박을 받는 상황이만 오늘 본문 1-2절에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1절에 히스기야는 대신들과 함께 애통하면서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굵은 배를 두르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갑니다.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두르는 행위는 누가 죽었을 때에 슬픔을 표현하거나 심판을 당해 겸손히 회개하는 행동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처럼 베옷을 입고 성전으로 들어간 것은 스스로 겸비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여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히스기야 자신만 옷을 찢고 베옷을 입은 것이 아니라 왕궁 책임자 엘리야김, 서기관 세바, 그리고 경륜 있는 연로한 제사장들도 베옷을 입혀서 이사야 선지자에게로 보냅니다. 왕이 신하들을 선지자에게 보냈다는 것은 지금 맞이한 군사적, 정치적 위기에서 하나님을 유다의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고 온 세상의 주권자로 인정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사실 앞서 왕하 18장에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조공을 보내 위기를 타개하려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히스기야 왕의 행동은 무언가 변화되었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이러한 변화가 히스기야가 이전에 저지른 실수를 무마하거나 수치를 없애주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변화와 결단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히스기야가 들어서기로 결심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신하들을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내면서 어떤 당부를 하고 있습니까? 3절에 현재 예루살렘의 상황을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으로서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지만 해산할 힘이 없는 여인의 모습이 지금 남 유다의 모습임을 상기시키면서 4절에 앗수르의 랍사게가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하였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면 하나님께서 그 말로 인하여 앗수르를 물리쳐주시기를, 그리고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일하여 주시기를 이사야 선지자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장면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상황 가운데 벌어진 일에 대해 그분 스스로 일하시도록 철저하게 맡기는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나의 명예’보다는 하나님의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일이고,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처분해 주시기를 맡겨드리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요청하는 행위입니다.

    ‘내가 열심히 할테니까 하나님 도와주세요!’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십시오.’라고 철저히 맡겨 드리는 것이 바로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성도는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 그리고 기도하는 동안에는 성도들에게 ‘절망’은 허락될 수 없습니다. 이 새벽에 기도하러 나오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십시오. 주님께서 일하여 주십시오.’라고 맡겨드리는 바른 기도를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요청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6-7절의 말씀을 통해 ‘산헤립’의 죽음을 예고하시고, 남 유다의 구원을 간접적으로 알리십니다. 그리고 이사야는 히스기야의 신복들에게 이 사실을 전함으로서 나라와 왕을 위한 중보자, 그리고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하게 감당합니다.

    하나님께서 산헤립과 그와 더불어 온 앗수르의 군대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는 ‘군사력’이 아닙니다. 산헤립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거짓말’로 유다 주민들을 공포에 몰아넣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도구 또한 그들을 두렵게 할 ‘풍문’, 즉 ‘말’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나오지 않고, 뒤에 나오지만 결국 그 ‘풍문’ 만으로 앗수르 왕을 죽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주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이들을 지키십니다. 어떤 방식으로 지키십니까?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쏟아내는 협박과 회유를 스스로 멸망을 가져올 말이 되게 하셔서 스스로 무너지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8-13절은 산헤립의 더욱 강도 높은 거센 위협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히스기야에게 분명 지키시고, 모든 상황을 반전시키실 것을 기대하게 하셨지만, 기대와는 달리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그러자 히스기야는 14절에 산헤립의 편지를 가지고 성전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치고는 하나님을 향하여 유다의 구원을 기도로 간청합니다.

    앗수르의 왕들이 여러 민족과 땅을 황폐하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 민족의 신들을 불태워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신들이 멸망한 것은 그것들이 다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작품이며, 나무와 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예루살렘을 구하심으로써 천하 만국에 하나님만 살아계신 참 신임을 증명하셔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그 사실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에게 지금은 어느 때보다 위태로운 시기이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여호와만 홀로 하나님이심을 증명할 기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히스기야의 간구의 초점은 주의 이름이 수치를 당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분의 영광의 회복이었습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문제 해결도 중요하지만, 만약 주님을 향한 초점을 놓치게 되면, 아무리 상황이 잘 해결되어도 그 과정과 이후의 삶이 이기적 욕심으로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려움으로 마음이 좁아지지 않도록, 그리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상황 너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늘 그분과의 관계에 초점 맞추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함으로 말미암아 늘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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