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왕하 20:12-21
◎ 제목: 주의 은혜를 지속하는 삶
1. 본문개요 및 관찰
a. 12-19절: 바벨론 사절단과 히스기야
1) 12-15절- 바벨론 사절단과 히스기야의 악행
2) 16-19절- 히스기야에게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
b. 20-21절: 히스기야 통치의 종결부
2. 적용
오늘 본문은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 걸렸다가 치유된 직후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치유를 축하하기 위해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에게 사절단을 보냅니다. 이때 바벨론 왕은 ‘브로닥발라단’입니다. 그가 바벨론 왕으로 있을 때는 아직 ‘앗수르’의 세력이 약화되지 않은 때로 바벨론이 왕성하기 이전의 상황입니다. 바벨론은 관례적인 외교 정책으로 사절단을 보낼 때 서신과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들을 맞이하고는 자신의 모든 부와 힘의 근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는 이사야를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듣습니다. 심지어 나라의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저주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히스기야의 전 생애를 생각할 때에 낯선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은, 죽을 병으로부터 치유까지 받은 그가 이렇게 주님의 심판의 예언을 받게 된 것입니까? 우리는 히스기야의 모습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 하는 것일까요?
히스기야는 13절에 바벨론에서 온 사신들에게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 그리고 보배로운 기름과 군기고, 창고의 모든 것을 다 보여줍니다. 이 일을 알게 된 이사야 선지자는 14절에 히스기야에게로 나아와서는 어디에서 온 사신인지를 묻습니다. 바벨론에서 온 사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이사야는 15절에 무엇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는지를 묻자 히스기야는 보여주지 않은 것이 없다고 답합니다. 이에 이사야는 16-18절에 히스기야와 그의 후손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징계를 나열하게 되고, 이에 히스기야는 ‘내가 사는 날에는 태평할 것이니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히스기야는 왜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을까요? 정치적, 외교적 맥락에서는 이해가 가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아직은 ‘앗수르’의 힘이 강력하기 때문에 히스기야는 ‘바벨론’과 이른바 ‘반앗수르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 동맹을 강화할 목적으로 예물과 편지를 보낸 바벨론 왕의 사신에게 왕궁의 보물고와 군기고, 그리고 창고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보여준 겁니다. 경제력과 군사력을 과시함으로 말미암아 자신과의 동맹을 선택한 바벨론의 결정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증명하려고 한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히스기야의 행동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훼손하는 행동입니다. 히스기야가 죽을 병에서 나은 것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데에는 얼마 시간이 나지 않았고, 그것은 곧 히스기야의 겸손의 유효기간이 다 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자랑하였고, 그가 자랑하는 만큼 하나님은 가려지고 지워진 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만이 멸망의 선봉인 이유는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그 결과는 늘 하나님의 징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것은 인간에 의해 내가 다뤄지는 것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는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결국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보여준 모든 것은 언젠가 앗수르를 이기고 고대 근동 지역의 패권을 차지할 바벨론으로 다 옮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이 환관이 되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동맹국이 내일에는 나를 정복하는 정복국이 될 수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세상의 이치입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버려두고 세상을 더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모한 일인지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가운데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자명합니다. 바로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나를 상대할 때에, 다름 아닌 ‘하나님’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가운데에서 믿는 자들이 취해야 할 삶의 방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 선고를 이사야에게 들은 히스기야는 19절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라고 답했고, 또한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히리요‘라고 반응합니다. 이러한 히스기야의 반응은 자칫 안도하는 반응으로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 히스기야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히스기야의 이러한 반응은 ‘핑계 없는 인정의 결과’라는 사실로 우리는 받아야 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겁니다. 히스기야가 ‘내가 사는 동안에는 평안과 안전이 있으니 어찌 선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한 것이 결코 안도감이나 ‘내가 살아 있을 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니 다행이다.’라는 관점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심판 선고를 그대로 수용합니다. 변명하지 않고, 핑계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그 판단이 선하다고 인정합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오만했고, 교만했으며, 온전히 신실하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합니다. 19절의 히스기야의 반응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송구함에서 비롯된 표현이라는 겁니다. 비록 실수 하였지만 자신의 마음의 교만함에 대하여 스스로 겸비함을 되찾았기 때문에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당대에 일어나지 않았다는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제의 은혜를 망각하기 잘하는 존재들입니다. 오늘의 웃음이 내일은 울음으로 바뀔 수 있고, 오늘의 울음이 내일의 웃음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일희일비’가 다반사인 생활의 연속이라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우리 믿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매일의 순종과 의뢰입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되, 삶에서 그분과의 바른 관계가 표현되고 이어지고 있는지,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방법은 매일 일용할 은혜를 구하며, 매 순간 겸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겸손과 순종으로, 늘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머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