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왕하 25:8-30

◎ 본문: 왕하 25:8-30
◎ 제목: 절망 속에서 건진 희망

1. 본문개요 및 관찰
    a. 8-21절: 예루살렘의 몰락과 바벨론 유수
    b. 22-26절: 유다 총독 그달리야
    c. 27-30절: 여호야긴 왕의 석방 소식

2. 적용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본문은 결국 남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는 장면과 멸망 이후에 피어난 희망의 소식에 대한 내용으로, 열왕기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열 아홉째 해 오월 칠일에 느부갓네살의 시위대장인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과 왕궁, 그리고 이스라엘의 귀족들의 집을 모조리 불태웁니다. 그리고 10절에 바벨론의 군대는 예루살렘 주위의 성벽을 헐어버립니다. 국가로서의 통치가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로 남 유다를 만들어 버린 겁니다.

    또한 11-12절에서는 이른바 ‘성 중에 남아 있는 백성’, 즉 남 유다의 지도자 계층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을 모조리 바벨론의 포로로 끌고 갑니다. 그리고는 12절에 그 땅의 비천한 자들, 못 배우고 가난한 자들을 남겨두어서 그들로 하여금 포도원과 농경지를 경작하도록 합니다. 이러한 조치는 남 유다라는 나라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하려는 바벨론의 전략이 깔려 있습니다. 반란을 꿈꾸지 못하기 위한 조치라는 거죠.

    바벨론은 단순히 성전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성전의 모든 기물들을 가지고 갑니다. 성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 여호와 성전의 놋 바다를 깨뜨립니다. 14절에는 가마들과 부삽들, 숟가락들과 모든 놋그릇을 또한 다 가져갔다고 합니다. 바벨론의 군대는 성전 안에 있는 놋, 금, 은으로 만들어진 모든 쇠붙이는 다 가지고 갑니다. 그리고 19-20절에는 성전을 지키고 있던 대제사장과 부제사장, 성전 문지기, 성 중에 있는 사람들, 왕의 시종들, 장관의 서기관 등을 사로잡아 하맛 땅 리블라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 데리고 가자 그들을 다 쳐 죽였다고 말합니다.

    바벨론이 이 같이 성전의 기물들 다 가지고 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전 안에는 ‘신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대 전쟁은 신들의 전쟁입니다. 그래서 만약 한 국가가 다른 국가와 전쟁을 해서 이기게 되면, 점령당한 국가의 신전에 있는 신상을 자신의 나라로 가지고 갑니다. 사람만 포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이 너희의 신을 이겼기 때문에 너희의 신도 우리의 포로가 된다는 논리인 겁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을 들어가 보니까 신상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성전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다 가지고 가는 겁니다. 신상 대신인 겁니다. 그야말로 ‘성전’이 훼손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포로가 되어 유배를 떠나는 겁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으로의 유수는, 단순히 그 나라 백성의 문제가 아니라 ‘성전’의 문제라는 겁니다. 성전이 포로가 되고, 잡혀 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 유다는 더욱 절망에 빠지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저변에 흐르던 ‘성전 불패’의 신학이 무너진 겁니다. 하나님이 떠나셨습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약탈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부터 완전히 얼굴을 돌려버리셨음을 뜻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영광의 땅은 하나님이 떠나시자 황량한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 없는 부요함보다 하나님을 모신 가난이 더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을 갖추어도 사실상 폐허인 셈입니다. 영혼이 폐허인 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은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떠나시자 그간 소중했던 모든 것들이 아무 가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던 거룩한 성전 기구들이 이제는 금속덩어리로 전락하여 파괴되고 녹여지고 분해됩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근사해 보이는 건물이든 장식이든 책이든 관습이든지 간에 그 안에 복음이 없고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이 떠나가 바벨론에게 점령 당한 남 유다의 백성들은 존귀한 자들이 아니라 바벨론의 한 낱 노동력에 불과한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과 긴밀한 동행을 할 때에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돈이 많아서, 부동산이 많아서, 좋은 직장에 다녀서, 내 자녀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잘 하기 때문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고, 우리 가족이 괜찮은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누추하고 연약하고 가난해 보여도 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자체만으로 우리는 주님의 존귀한 자로 살아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것은 참으로 비참하고 끔찍한 사건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 바벨론으로 끌려간 이들을 통해 다시 소망을 만들어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성전에 갇혀 계실 분이 아닙니다. 성전은 하나님께서 단지 당신의 이름을 두시기로 작정하신 곳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곡해하여 성전 만능주의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과의 동행은 뒷전에 두자, 하나님은 그것을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잡혀간 바벨론 땅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붙든 자들을 하나님은 결국에는 예루살렘으로 돌이키셨습니다.

    그 징조가 27-30절에 나타난 ‘여호야긴 왕’의 석방입니다. 여호야긴은 BC 598년에 느부갓네살 왕에 의한 ‘제2차 예루살렘 침공’ 때에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그 후에 투옥된 지 37년, BC 561년, 느부갓네살이 죽고 그의 아들 에윌므로닷이 즉위한 해 제 12월 27일에 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28절에 에윌므로닷은 여호야긴의 지위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와 있는 다른 나라의 왕들보다 지위를 높이고, 29절에 그의 죄수의 옷을 벗기고, 일평생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는 호의를 베풀었다고 기록합니다.

    여호야긴의 석방은 하나님과 자기 백성간의 언약이 다시 회복될 희망의 불씨입니다. 그리고 그가 풀려난 지 약 25년이 지나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을 통해 BC 538년에 포로를 귀환시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영원한 나라에 관한 약속을 잊지 않으신 겁니다. 그러하기에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맺은 언약을 잊지 않으시기에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언제나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지요. 결국이 모든 것은 누구에 의해 온전히 완성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희미한 희망은 명백한 현실이 되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 희망의 증인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희망이 있음을 깨닫고 포기하지 않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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