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래 전도사 / 예레미야애가 1:12-22

◎본문: 예레미야애가 1:12-22

◎개요
12-16절 예루살렘의 탄식과 호소(라메드-아인)
17절 위로받지 못하는 시온(페)
18-19절 예루살렘의 탄식과 호소(차디, 코프)
20-22절 예루살렘의 간구(레쉬-타브)

◎본문연구
 오늘도 기도의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 은혜 충만한 하루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저녁에는 금요기도회가 있습니다. 함께 나오셔서 부르짖고 응답 받는 귀한 시간되길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애가 1장 전반부와 연결되는 1장의 후반부 말씀으로서, 시인은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된 참상을 전반부에 이어 계속 묘사하고 있습니다. 한때 찬란했던 예루살렘은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출애굽 시키시고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그 땅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에 눈이 멀었습니다. 지금껏 이스라엘을 돌보신 하나님을 모두 잊고, 가나안 이방 신들을 섬기다, 결국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참상을 본 선지자 예레미야는 저주의 원인이 바로 이스라엘의 많은 죄라고 앞선 5절에 탄식하여 말했습니다. 11절에서 그 탄식은 이제 기도로 변하여 하나님께 부르짖는 적극적 기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후반부 말씀을 보면, 이제는 기도뿐만 아니라, 시인 그 자신이 바로 예루살렘으로 동화되어 표현되는 것을 발견합니다. 분명 앞선 1장 초반부를 보면, 시인은 조국 예루살렘의 참상에 놀라, 그저 탄식하는 관찰자였습니다. 그래서, 3절 말씀에 관찰자 시점으로, ‘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 잡혀갔도다.‘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탄식이, 중반부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로 변화되었는데요. 그런데 오늘 1장 13절 마지막에 보면,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말하며, 어느덧 시인이 자신을 예루살렘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의 고통과 어려움을 나 자신의 어려움으로 동일시하며, 예수그리스도처럼 죄를 짊어지고 조국의 고난과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태도가 15, 18, 22절에 이르기까지 계속 나타나며 조국에 대한 자신의 회개와 반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본문 말씀을 읽으며, 시인 예레미야처럼 나는 조국의 고난과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삼고 동참하고 있는지 묵상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저 방관자, 관찰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향한 나의 탄식과 긍휼이 내 안에서 자라나고,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한 부르짖는 기도가 흘러나와, 공동체의 고통과 어려움이 내 기도제목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한국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늘 시인의 기도처럼 회복과 응답을 약속해주실 줄 믿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 시인은 9, 11절에서 적극적인 기도를 한 후에, 12절부터, 나라의 고통이 시인 자신의 고통이 되어 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고통의 책임에 대해, 너희는 이 고통과는 관계가 없는지 시인이 묻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시인에게는 하나님이 가하시는 저주와 괴로움이 현재 진행형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의 벌은 이처럼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러웠습니다. 13절에서는 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라고 시인이 묘사합니다. 그래서 16절에 이로 말미암아 내가 울고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린다고 고통에 대해 수용해야만 하는 이스라엘의 처지를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루살렘에 이러한 괴로움이 닥쳐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18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의로우시지만,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시인은 이 모든 환란의 원인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20절 후반부에서 다시 반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함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기다리는 하나님이시지만, 언제까지나 우리를 용서하시고 끝도 없이 기다리는 분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이스라엘은 이 공의의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에게 심판이 다가온다는 것조차도 모를 정도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우상 숭배하며 멀어지다가, 결국 하나님의 재앙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안타까워하고 불쌍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마지막에서 시인은 단순히 예루살렘이 벌을 받는 것에 멈추고 있지 않습니다. 21절 하반절에 “그러나 주께서 그 선포하신 날을 이르게 하셔서 그들이 나와 같이 되게 하소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처벌의 회초리로 사용하시는 이방 민족들, 원수들을 언제까지나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들에게도 동일하게 벌을 내려주시기를 간청하고 있습니다. 또, 22절에서도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벌을 그치시고, 도리어 처벌의 회초리로 사용하시는 회초리들을 부러뜨려주시길 간구하며 시인은 1장을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기도처럼 때가 차면,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원수 이방 민족들에게도 동일하게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부모가 마치 자녀를 훈계한 후에 그 회초리를 부러뜨리듯이 이방민족들은 더더욱 하나님 앞에 부러뜨림 당할 것입니다. 다만, 그 때가 찰 때가지, 하나님의 벌이 멈출 때까지 이스라엘은 잘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다만 탄식과 중보하는 기도를 통해 이 환란이 경감될 수 있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공동체에 긍휼함과 안타까움을 갖고 기도하는 예레미야 같은 자가 쓰임 받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런 한 사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나라와 민족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어 기도할 자를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도 응답해주실 줄 믿습니다. 비록 오늘날 이 나라와 민족이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믿는 그 한 사람의 기도로 말미암아, 우리나라와 한국교회를 긍휼히 여기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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