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호 1:1-11
◎ 제목: 음란한 시대를 향한 메시지
1. 본문개요 및 관찰
1) 1절: 표제-호세아와 그 시대
2) 2절: 하나님의 명령-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라
3) 3-9절: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 은유
a. 첫아들 이스르엘과 이스라엘의 멸망 예고(3-5절)
b. 언약 폐기- 딸 로루히마와 아들 로암미(6-9절)
4) 10-11절: 이스라엘의 회복 약속
2. 적용
호세아서는 ‘열 두 소선지서’를 시작하는 첫 번째 책입니다. 유명한 영성학자인 ‘유진 피터슨’은 호세아서에 대해서 ‘현실 위에 태산처럼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실재는 바로 하나님 사랑’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다른 선지자들과 달리 소명 기사가 없습니다. 하지만 호세아서가 보여주는 다양한 이미지와 비유의 언어, 시적 상상력, 탁월하게 사용된 풍부한 은유들 때문에 그는 아마도 많은 학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여러 학자들이 평가합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때에 북 이스라엘은 전성기의 평화와 번영을 누렸습니다. 그가 선지 활동을 할 때에 북 이스라엘의 왕은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즉, ‘여로보암 2세’입니다. 이 시대의 북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의 ‘황금시대’에 견줄 만큼의 번영을 누렸습니다. 상업과 무역이 융성함으로 말미암아 상인 부유층이 출현하였고, 토지 축적을 근간으로 대토지 소유와 포도주, 올리브 등의 작물 재배를 통해 수입을 올렸던 시기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집약 농업’으로 인하여 토지가 없는 농민들은 빈곤화 되고 채무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며 탐욕과 방종과 불의와 사치를 일삼았습니다. 상류층 중심으로 기울어진 사회-경제 구조는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등 사회적 갈등을 고조시켰습니다. 또한 경제적인 번영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당시 사회와 문화를 타락시켰습니다.
본문 2절에 호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메시지를 받습니다. 그것은 음란한 여자를 맞아들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 땅이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개인에게는 너무나 불행한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을 떠나 바알을 숭배하는 이스라엘을 ‘비정상적인 결혼을 통해 외도하는 뒤틀린 모습’임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가 선지자로 하여금 가혹한 명령을 수행하게 해야 할 만큼 심각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풍요에 젖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시대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의 음란한 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경고하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대가 호세아의 시대보다 깨끗하고 덜 타락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신의를 저버리고 노골적으로 풍요의 신, 바알을 좇았던 그들의 모습이 오늘 성장과 번영을 좇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지금 이 시대에 ‘바알’과 같은 우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의 가장 강력한 우상이 있지요. 바로 ‘돈’입니다. 그러하기에 지금 이 시대도 결국은 호세아 시대의 타락한 모습과 똑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교회도 성도도 마찬가지로 돈을 좇고 성장과 번영을 좇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경책하며 돌아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3-9절까지는 호세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고멜’이라 이름하는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습니다. 그리고 아들 하나와 딸 둘을 연달아 낳게 됩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 이름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시고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고 4절에 보충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르엘의 피’는 여로보암 2세의 증조부였던 예후가 오므리 왕조를 멸망시킬 때 흘린 피를 의미하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예후 왕조’를 심판하시겠다는 의지입니다.
오므리 왕조에서 가장 유명한 왕은 ‘아합’일 겁니다. 아합은 북 이스라엘을 ‘바알 숭배’의 온상으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 때문에 사실상 ‘예후’의 손을 들어 ‘오므리 왕조’를 끝장 내신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후는 북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자’들을 몰아내는 등, 훌륭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후는 자신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잔혹하고 불의한 통치를 일삼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르엘’에서 피로 세워진 예후 왕조의 ‘활’을 꺾어버리신다는 뜻을 담아, 호세아로 하여금 아들에게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을 짓게 하였습니다. 둘째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로’는 ‘없다, 아니다.’라는 뜻이고, ‘루하마’는 ‘긍휼’을 뜻합니다. 즉, ‘로루하마’는 ‘긍휼을 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셋째 딸의 이름은 ‘로암미’인데, 역시 ‘로’는 ‘없다, 아니다.’라는 뜻이고, ‘암미’는 ‘내 백성’을 뜻합니다. 즉,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지 않으실 뿐더러, 하나님을 떠난 북 이스라엘과의 언약 관계가 끝이 났음을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행했던 ‘예후’였지만, 그 방식과 잔인함으로 인하여 결국에는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 관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반대 편에 서자 하나님은 그 언약 관계를 거두어버리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지금 너희가 낳고 있는 아이들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묻고 계시는 듯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못한 방향으로 우리의 신앙이 흘러가고 있다면, 자칫 하나님으로부터 ‘로암미’라고 선언을 받지 않도록 하루빨리 돌이켜야 하지 않을까요? 이 새벽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여주시는 이름이 있다면 그 말씀에 반응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렇게 심판의 메시지를 쏟아 놓다가 10-11절에서 하나님은 갑자기 심판 이후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십니다. 백성들이 칼과 병거보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로암미’라 한 곳에서 다시 ‘암미’로 인정받고 언약 관계를 회복시키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전쟁의 위험은 사라지고, 자손은 번성하며, 분열이 극복되어 한 의로운 사람의 통치 아래 ‘안정’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거치며 음란이 완전히 걷히고야 도래할 미래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빛이 비칠 때 가능하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 만이 희망입니다. 우리는 11절의 ‘한 우두머리’가 누구인지 압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얻은 저와 여러분에게는 숙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함으로, 참된 회개를 통하여 내 심령이 새로워지고 더욱 거룩을 사모하는 ‘성화의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매 순간 예수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