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호 5:1-15
◎ 제목: 총체적 난국을 돌파하는 길
1. 본문개요 및 관찰
a. 1-4절: 이스라엘의 죄와 벌
1)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죄와 벌(1-2절)
2) 이스라엘의 음행과 무지(3-4절)
b. 5-15절: 에브라임과 유다의 죄와 벌
1) 이스라엘과 유다의 교만(5-7절)
2) 유다와 이스라엘의 전쟁과 벌(8-12절)
3) 에브라임의 병과 유다의 상처(13-15절)
2. 적용
총체적 난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뭔가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안과 밖이 엉망진창인 상황을 일컬을 때 사용하는 표현이지요. 지금 북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내부적으로는 부패하고 외부적으로는 위협을 받고 있으니까요. 이른바 ‘종교 지도자’들은 영적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상적 탐욕’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이른바 ‘북 이스라엘-시리아’ 연합군과 ‘남 유다’ 사이의 전쟁으로 인하여 외부 정세도 너무나 불안한 상황이라는 거죠. 그런데 더 문제는 지도자나 백성이나 모두 안일하게 이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각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은 다 ‘썩은 동아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우상 숭배에 열을 올리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니까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 편일꺼야!’라고 착각합니다. 과연 이스라엘은 이 총체적 난국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1절에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먼저 ‘제사장들과 왕족’들을 향하여 날이 선 비판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시면서, ‘미스바에 대하여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 친 그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미스바와 다볼은 이스라엘의 기나긴 역사를 돌아보게 만드는 중요하고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미스바는 ‘사무엘’ 때에 대각성이 일어났던 장소이고, 다볼은 사울 왕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여호와의 영’이 크기 임함을 경험한 장소입니다. 그리고 또한 다볼은 ‘드보라 사사’ 때에 ‘하솔’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긴 ‘영광의 장소’입니다.
하지만 이 두 곳은 그런 역사적 의미가 있는 동시에 ‘부패와 불의와 일그러진 제의’가 행해진 장소입니다.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갈라진 후, 북 이스라엘에 속한 미스바와 다볼에는 아마도 ‘우상의 제단’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패역자 자들이 살육죄에 깊이 빠져 있음으로 인하여 전부 멸하여 버리겠다고 2절에 선언을 하시는 겁니다.
백성을 섬겨야 할 이들이 사낭꾼처럼 올무를 놓고 그물을 친다는 것이 사실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고 무지와 탐욕이 도를 넘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은 오직 심판뿐입니다.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버려둔 채, 여타 종교와 같이 ‘기복적 유익’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영적 둔감함은 곧 영적 사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멸망할까 조심하며 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영적 민감함으로 분별하는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5-7절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모두를 향하여 하나님의 경고가 부어집니다. 북 이스라엘의 경우 ‘여로보암 2세’의 통치 아래 마지막 번영을 누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나름 자부심이 있었지요. 그래서 5절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얼굴에 교만이 드러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교만이라는 죄악으로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졌고, 덩달아 남 유다도 그들과 함께 넘어진다는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과 유다의 우상숭배의 음행에 빠진 것을 7절에 ‘정조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사생자를 낳은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외형은 분명 하나님의 백성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바알의 자식’의 행실이기에 그들은 이미 스스로 ‘사생자’임을 공언하는 꼴입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는 죄악 가운데 있는 에브라임과 유다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눈을 현혹하려 할지라도 하나님은 속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예배 생활이 ‘이원론적 삶’을 가려 보려는 ‘종교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됩니다. ‘교회에 갔을 때만 예배 잘 드리고, 일상에서는 내 맘대로 한다고 하나님이 뭐 어쩔 건데?’ 그런 마음가짐은 멸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허망한 욕망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종교 의식’으로 감춰지지 않습니다. 매 순간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이 새벽기도회 자리에 나아오신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이 늘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세워 져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북 이스라엘은 ‘므나헴 왕’ 시절에 앗수르 왕 ‘불’에 의해 침공의 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에 엄청난 조공을 바쳐서 앗수르가 되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북 이스라엘은 장기적으로 주변 국가와 연합을 통하여 ‘앗수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은 ‘베가 왕’ 때에 아람 왕 ‘르신’과 함께 ‘반 앗수르 연합’을 형성하고, 남 유다 왕 ‘아하스’에게 동참할 것을 요청하지만, 남 유다가 따르지 않지요. 그래서 남 유다를 침공하게 되고, 남 유다는 ‘앗수르’에게 급히 조공을 바치며 개입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 결과 앗수르가 아람을 침공하여 아람 왕 르신은 죽게 되고, 북 이스라엘 베가 왕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교대로 앗수르의 도움을 청합니다. 결과는 어떤 쪽도 승자가 되지 못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떠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모두 하나님 앞에 어떻게 벌을 받게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좀’과 ‘썩게 하는 병’으로 벌하시는 모습을 보에 됩니다. 좀은 옷을 못 쓰게 만듭니다. 그리고 뼈를 썩게 하는 병‘ 사람을 죽게 하듯, 보내신 질병으로 죄를 징계하십니다. 그리고 14절에 하나님께서 움켜쥐고 탈취해 가더라도 아무도 건저 낼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분노하신 하나님은 굶주린 사자처럼 무섭게 달려들어 난폭하게 공격하십니다. 죄를 뉘우치고 얼굴을 구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백성들로부터 얼굴을 감추어버리십니다. 그리고 15절에 그렇게 고난 받을 때에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간절히 구하게 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열렬히 찾지 않으면 백성과 함께 동거하지 않겠다고 작정을 하신 겁니다. 풍요와 우상의 제국을 사랑한 두 나라에게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고통과 탄식의 시간을 주신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고난과 침묵, 외면과 부재는 다시 하나님을 찾게 하시려는 감춰진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세삼 깨닫게 됩니다. 혹 지금 내가 맞이한 문제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엉뚱한 것에서 답을 찾으려는 결과는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참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여 오직 주님으로만 회복될 수 있음을 주님께 고백함으로 회복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