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호 8:1-14

◎ 본문: 호 8:1-14
◎ 제목: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1. 본문개요 및 관찰
    1) 1-3절: 언약 파기에 따른 형벌 예고
    2) 4-6절: 사마리아의 우상
    3) 7-10절: 쓸모없는 그릇, 이스라엘
    4) 11-14절: 범죄의 도구가 된 제단들

2. 적용
    사람 대 사람 사이에서도 ‘누군가를 잘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관계 속에서 경험되어야만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싫어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고, 그럴 때 우리는 진정으로 안다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는 겁니다. 또한 신뢰의 문제이자 인격적 사귐의 문제라는 겁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한 ‘북 이스라엘’이 보인 행동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쓸모가 없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안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헛되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줍니다. 거짓된 지식은 끊임없이 위선과 기만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금 북 이스라엘이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본문 1절에 ‘나팔을 네 입에 대라’는 명령은 뿔 나팔을 불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은 크게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한 가지는 군사적 상황에서 적국의 침략을 알리는 경보로 전투에 임하라는 소집의 명령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용도는 종교 의식에서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하라는 호출의 소리로 사용됩니다. 오늘 1절에서 ‘나팔을 불라’는 것은 문맥상 이 두 가지 다가 해당이 됩니다.

    1절에 뒤이어 나오는 대로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을 덮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 이 나팔은 갑작스런 적국의 침략에 대한 경고의 나팔을 불라는 의미가 먼저입니다. 그러면서 더불어 ‘여호와의 집’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실행하는 심장부입니다. 그러하기에 ‘예배의 장소에서 심판이 시작되고 있는 안타깝고 답답한 현실을’ 보면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망가지고 있음을 경고하여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도록 나팔을 불라는 의미도 되는 겁니다.

    2절에는 이런 급박한 상황을 맞이하면서도 ‘나의 하나님이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거짓과 위선이라는 거죠. 왜냐하면 3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만 선을 버리고 원수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부르면 달려와 구원해 주는 편리한 하나님으로 아는 지식은 잘못된 지식이자 언약 백성의 의무와 책임을 외면한 반쪽 지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강력하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 지식은 언약을 아는 바른 지식이 될 수 없습니다.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한 백성들에게 원수가 독수리처럼 덮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철저히 외면해 버리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이 새벽 기도회 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아는 것과 나의 행동이 일치해야 합니다. 내가 안다면, 하나님도 나를 아셔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관계입니다. 기도의 자리는 하나님과 깊은 관계 맺음의 자리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우리가 머물러 있을 때, 그 기도는 참된 기도가 되고, 하나님과의 깊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깨닫고 실천할 힘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 새벽에 나아올 때마다 참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에 거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4-6절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제멋대로 왕을 세우고 우상을 만드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고발합니다. 왕위는 모반과 반역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우상은 은과 금으로 만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정변으로 차지한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탐욕의 결과물인 금송아지 또한 부수어버리십니다. 7-10절은 조공을 통해 얻은 동맹도 바람을 심는 것과 같은 어리석고 헛된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공을 통해 강대국의 보호를 받으려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8절에 ‘즐겨 쓰지 아니하는 그릇’이라 칭하면서 조롱하십니다.

    우상도, 동맹도 의지할 대상이 될 수 없음에도 북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그것에 투자합니다. 결국 부서지고 광풍에 흩어질 허망한 것들인데, 헛된 것을 좇다가 하나님 백성의 존귀와 영광을 잃고 용도 폐기되니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어떤 것도 다 헛됩니다. 헛된 것을 좇다가 길바닥에 버려지지 않도록 늘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할 줄로 믿습니다.

    11-14절은 ‘고발’의 대상이 ‘예배’로 바뀝니다. 11절에 에브라임이 죄를 위해 제단을 만든다고 고발합니다. 여로보암 2세 통치 시기는 경제적 부흥기였고, 정치 문화적 발흥과 함께 ‘희생 제사와 건축 기술’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제의’도 이러한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 같습니다. 속죄하기 위한 제단들이 도리어 죄가 되는 모순적이고 어이없는 현실이 발생한 겁니다. 희생 제사와 제단으로 언약과 율법을 대체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도처에 만들어진 제단은 범죄를 세탁하는 장소였고, 드리는 제물은 악을 은폐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통해 마치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처럼 포장해 보려 하지만,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통한 변화는 외면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3절에 그들을 다시 애굽의 노예 상태로 되돌려 버릴 것을 선언하십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읍을 많이 쌓고, 왕궁을 세워 안전을 도모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불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유일한 방법은 오직 두 손 들고 나와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인애’를 실천하는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북 이스라엘’에게 보내신 경고를 무겁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모습 속에서는 과연 북 이스라엘의 모습은 없는지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잘 알고 있습니까? 내가 보고 싶은 하나님만 편집해서 바라보면서 그 하나님이 나에게 무언가를 해 주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행하는 것, 믿는 것과 의지하는 대상이 일치해야 함을 다시 한 번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의 삶이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한다는 것으로 우리의 삶에서의 ‘불의와 불법’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회개는 없으면서 예배한다고, 헌금한다고 나는 다 괜찮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지정한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십니다. 고백에 합당한 실천과 행함을 통하여 참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다운, 참 그리스도인, 참 성도의 삶을 내 모든 전존재와 삶을 통해 드러내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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