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호 12:3-6

◎ 본문: 호 12:3-6
◎ 제목: ‘속이는 자’ 야곱의 후손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좀 더 고상한 사자성어로 ‘부전자전’이지요. 부전자전은 ‘부정적인 의미’가 많이 희석되어 있지만,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말은 아버지가 행한 그 대로 자식이 그 행실을 빼다 박았다는 비난의 어조   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의 비판을 받고 있는 ‘북 이스라엘’의 시조는 ‘야곱’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위대한 이름답게 ‘이스라엘’은 이름값을 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처지는 ‘야곱’이라는 거죠. ‘속이는 자’라는 겁니다. ‘부전자전’으로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살아야 함에도, ‘그 아비에 그 자식’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큼 야곱의 이름의 뜻과 같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시대의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강대국 사이를 오가면서 기회주의적 처신으로 일관합니다. 앗수르와 조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열방이 행했던 것처럼 인애와 진실이 아닌 기만과 거짓과 포악으로 행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을 앞세우면서, 뒤에서는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행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상대로 거대한 사기극을 벌인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에 대해 오늘 읽은 본문 3절은 그들 가운데에 ‘야곱 DNA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모태에서부터 형과 싸우고 힘으로 하나님과 겨뤘습니다. 평생 속고 속이며 뺏고 빼앗기는 인생을 살았지요. 거짓과 기만에 능한 야곱처럼 후손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속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그 아비에 그 자식들’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그랬던 야곱이 4절에 이스라엘이 된 과정을 설명합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자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요. 밧단 아람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는 야곱이 형 에서가 자신을 맞이하러 온다는 말에 무서워서 가족과 가축을 여러 떼로 나누어서 앞세워 얍복 강을 건너게 한 후, 자신은 남아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천사가 찾아오지요. 열심히 씨름을 하다가 해가 떠서 떠나려는 천사를 붙들고 자신에게 축복해 달라고 울부짖을 때에 하나님은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와 자신이 도망 갈 때에 돌베개에 기름을 붇고 ‘여호와의 집’이라 불렀던 ‘벧엘’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게 되지 않습니까?

    야곱은 이처럼 변화되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된 이름을 물려받은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신실하게 서야 함이 옳다는 겁니다. 하지만 결코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이익을 위해 다투고 쉽게 배반하는 것은 ‘야곱’ 때부터 있었던 뿌리 깊은 죄였습니다. 그 버릇을 못 버립니다. 거짓 저울로 장사하는 상인처럼 온갖 술수와 편법으로 부자가 되었음에도 스스로 깨끗하다 자랑하며 불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라헬을 얻기 위해 종살이도 마다하지 않았던 야곱처럼, 목적을 위해서라면 누구라도 섬길 수 있습니다. 에브라임에게 인애와 정의는 사치였고 이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9절을 보시면, 오로지 재물만 중요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출애굽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징벌을 선언하시고, 척박한 광야의 장막으로 다시 돌려보내겠다고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징벌 선언은 갑자기 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0절을 보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러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통해 비유를 베풀어 멸망에 대한 메시지를 보내셨다는 거죠. ‘아합 왕’ 때에 엘리야와 그 뒤를 이은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은 끊임없이 선포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호세아 선지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그대로 ‘야곱’의 길을 걷지 않고, 변화 된 ‘이스라엘의 길’을 걷기를 원하셨다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말을 청종하지 않고 형식적인 제사에 계속 매달리는 모습을 봅니다. 자신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도리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눈가리고 아웅을 하려는 겁니다. 인애와 정의는 실천하지 않고 거듭하여 제물로 거짓 양심을 달래려 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11절에 ‘돌무더기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을 계속 이어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한심하게 보시는 겁니다. 순종 대신 값비싼 황소로 답하는 뻔뻔함에 하나님은 고개를 저으십니다. 그리고 14절에 결단 하십 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피로 그의 위에 머물러 있게 하며, 그의 수치를 그에게 돌릴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북 이스라엘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했습니까? 맞습니다. 바로 야곱이 얍복 강에서 행한 선택이어야 했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던 선택 말입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긴 야곱은 울면서 구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사기꾼인 그를 받아 주셨습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곳을 ‘송아지를 숭배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벧아웬’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야곱’이 아닌 ‘이스라엘’로 나에게 ‘벧엘’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거죠.

    호세아는 돌아와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하나님을 바라라고 요구합니다. 울며 간청하면, 야곱이 얍복 강에서 그랬던 것처럼 너희가 그렇게 돌이키고 나에게 나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 시간 저와 여러분에게 동일하게 요청하십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하고, 죄의 자리에 서 있다면 그 발걸음을 돌이키라고 요청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정말 나를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제발 좀 ‘그 아버지의 그 자식’이라는 말 듣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이 세상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탄의 자녀’처럼 거짓과 불법과 술수와 편법으로 살지 말라고 말입니다.

    미국 예일대 정신과 의사로 재직 중인 나종호 교수의 책 ‘만일 내가 그 때 내 말을 들어 줬더라면’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나 교수의 다섯 살 된 아들이 이렇게 묻더랍니다. “아빠, 아빠가 만난 환자 중에 누가 가장 용기가 있었어? 아줌마였어, 아저씨였어?”, 질문이 쌩뚱 맞다고 생각했는지 “그건 왜?”라고 되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용기가 있어야 환자가 되지~ 모르는 사람한테 도와달라 이야기해야 하잖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람은 자신의 취약함을 누군가에게 노출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그런 용기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괜찮다! 이 정도면 교회도 안 빠지고, 직분도 있고, 교회 봉사도 어느 정도 하고, 괜찮다!’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나는 엉망이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욕심에 둘러쌓여 있다. 속여서라도 차지하고 싶다. 하나님 이런 불쌍한 저라도 괜찮습니까? 만나 주실 수 있습니까? 회복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세요.’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에 우리 주님 만나 주시고, 고쳐주시고, 사용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속이는 자 야곱의 후손에 주저앉지 않고, 참 이스라엘의 자손, 참 그리스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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