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암 4:4-13
◎ 제목: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
1. 본문개요 및 관찰
a. 4-11절: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
1) 제사에 열심인 이스라엘(4-5절)
2) 여러 재앙에도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6-11절)
b. 12-13절: 심판 선언- 여호와와의 만남을 준비하라
2. 적용
목회를 하면서 가장 감당이 안 되는 성도님들은 ‘자기만족적, 자기도취적 신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분들입니다. 이러한 신앙에 사로잡힌 분들은 어떻게 되기가 쉬울까요? 그렇습니다. 결국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기 전에는 결코 그 착각에서 빠져나오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된 본성’의 증거로 ‘자기중심성’을 이야기합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이 두려워 무화과 잎으로 알몸을 가리고 숨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는 ‘누가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 실과를 먹었냐?’고 묻습니다. 그 때 아담과 하와가 보인 반응은 뭡니까? 서로 자신이 잘했다는 겁니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결국 에덴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리 모두는 전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아모스서의 배경이 되는 ‘북이스라엘’은 경제만 아니라 종교 또한 번성을 했습니다. 하지만 딤후 3:5절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그야말로 종교생활로 일관하였습니다. 더 많은 제물로 제사를 드리고, 더 많은 돈을 갖다 바치지만, 참된 회개도, 순종도 눈 씻고 찾을 레야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바로 북이스라엘의 상태였습니다.
먼저 4-5절은 이스라엘의 거짓된 종교 행위를 조롱합니다. 4절에 제시되는 두 개의 지명,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 당시의 ‘제의의 중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곳에서 희생제사, 십일조, 감사제, 자원제를 드렸습니다. 아침마다 희생 제사를 드리고, 3일 마다 십일조를 드렸다고 하니 그들이 얼마나 종교 생활을 열심히 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는 ‘벧엘’로 가서 우상 숭배를 계속 해보라고 조롱합니다. 그렇게 계속 3일 마다 십일조 드려보라고 놀립니다. 진심 없이 겉으로만 제사 행위에 열중하는 모습을 풍자하고 있는 겁니다. 또한 5절에서는 감사제에 누룩을 넣어 드려보라며 율법을 위반한 제사 행위가 계속 되는 것을 비꼬아 지적하고, 낙헌제를 소리 내어 알리라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는 빠져 있고 오직 종교적 열심만을 자랑하는 모습을 꼬집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열심과 자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 이유가 ‘예배’ 때문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신앙생활 가운데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가장 분노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관심 없으면서 겉으로 드러난 ‘경건의 모양’에 열 올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거창한 예배’에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얼마나 성실한지를 보십니다. 매 순간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매 순간 그 분과의 관계에 민감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어지는 6-11절은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을 향하여 ‘다섯 번’의 기회를 주셨음에도 끝내 돌아오지 않은 이스라엘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다섯 번’의 기회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린 다섯 가지의 재앙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 재앙은 6절에 ‘양식’이 떨어지게 만드는 재앙이었습니다. 기근이지요. 두 번째는 7절에 추수 석 달 전에 비를 주지 않는 것이고, 세 번째 재앙은 농사에 흉년이 든 것입니다. 네 번째는 10절에 전염병을 보내 다수의 사망자를 낸 것이고, 다섯 번째 재앙은 11절에 소돔과 고모라처럼 일부 성읍을 무너지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여러 번의 기회 가운데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무지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재앙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이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거듭된 경고와 표징에도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았고, 모든 기회를 거절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에게 의지할 재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는 자신들의 죄를 감출 ‘제사’를 많이 드릴 수 있게 만들었고,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러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릇된 선민의식’을 더욱 공고히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다고 생각되면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향하여 주시는 ‘고난’은 ‘경고’이자 ‘기회’입니다. 그 시간을 하나님 앞에서 잘 보낼 때에, 내가 가진 것 의지하지 않고, 죄를 숨기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내 죄를 토하며,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권리’로 여김이 아니라 ‘은혜’로 받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따라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유일한 길임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거듭된 회개 요청을 계속 거절한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12-13절에 최종적인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아모스는 백성들이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은혜의 경험을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심판을 경험할 준비를 하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판주 하나님’의 모습이야 말로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의 모습’이고, 당신의 뜻을 알리고 실행하는 ‘집행자’의 모습이요, 빛을 사라지게 하거나 땅의 높은 곳을 밟는 ‘전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권능을 발휘하셔서 창조 질서를 격변시키실 수도 있고, 전쟁으로 악인을 징벌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를 가지고는 설 수 없습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려면 답은 하나뿐입니다. 회개하여 공의를 행하는 것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지금 ‘사막’과 같은 시간을 지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그 때에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바로 그 ‘사막’과 같은 고난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로 나와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다름 아닌 고난의 자리에 계시고,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한 내가 ‘사막’의 자리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 인생의 ‘사막화’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매 순간 우리의 마음을 낮고 겸비하게 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