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시편 109:1-15
◎제목 : 나는 기도할 뿐이라
◎개요
1-5절 하나님께 대적의 악행을 고발하고 호소함
6-15절 대적들의 불행을 기원
A.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소서 (6-8절)
B. 가족은 구걸하고 재산은 탈취 당하게 하소서 (9-11절)
C. 후손은 끊어지고 그들의 기억을 없애소서 (12-15절)
◎본문연구
오늘도 새벽예배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 은혜 충만한 하루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저녁에 금요기도회가 있습니다. 함께 나오셔서 기도하고 응답받는 귀한 시간되길 소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읽다보면 가끔 흠칫 놀라게 되는 장면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목사님께서 전해주신 사사기 레위인 첩의 본문이나, 또는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이야기 그리고 오늘 시편의 저주시 같은 본문을 볼 때입니다. 그 내용들이 너무 잔인하거나, 참 비인간적인 내용이라,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왜 성경에 이런 것까지 기록하게 하셨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잘 생각해볼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본질적으로 우리 인간은 죄 된 존재라는 겁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우리 스스로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우리 하나님께만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09편 말씀을 보면, 시편 마지막 제5권에 속하는 다윗의 시인데요. 성경학자들이 흔히 저주 시로 분류하는 시편입니다. 어마어마한 시인의 저주들이 109편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먼저 왜 그러한지, 본문 시인의 상황을 보면요. 암울하고 힘든 상황이 등장하는데요. 1절에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라고 시인이 탄식합니다. 그 이유는 2, 3절에 대적자들이 시인을 향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으로 속이며, 미워하고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왜 자신을 공격하는지 시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할 따름입니다. 게다가, 4절을 보면, 원래 시인은 그들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들을 믿었고 마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인이 베푼 사랑을 버리고 도리어 악한 말과 속이는 입술로 공격하는 기막힌 상황이 펼쳐진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그저 하는 수 없이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바라볼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만약 시인처럼, 현실에서 이런 답답한 상황을 동일하게 마주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누군가에게 내가 선의를 베풀고, 사랑하여 마음을 주었습니다. 신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받은 자가 도리어 내게 악한 입과 거짓된 입으로 와서 속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제는 심지어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공격,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에 우리가 내리는 결론과 행동은 “받은 만큼 돌려주자”입니다. 내면의 방어기제가 올라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떠올리며, 괘씸죄를 더해서 그 사람에게 돌려주는 게 우리 본능이고 정의로운 욕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요. 오늘 본문의 시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1절부터 4절의 기막힌 상황을 겪은 시인의 결론은 “나는 기도할 뿐이라” 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고백에서 하나님에 대한 시인의 믿음과 신뢰관계를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훑어보면 시인은 그 사람에게 자기의 행동과 실력으로 되갚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복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먼저, 5절에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의 결과는 6절에서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는 것입니다. 7절 하반절에는 그의 기도가 죄가 되며, 8절에서는 그의 연수가 짧아지는 등 하나님의 영역에서의 처벌을 기도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원수가 드리는 기도를 내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죄가 되게 할 수 없습니다. 또, 8절처럼 그의 연수가 짧아지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를 저주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기의 부족한 능력과 자기의 부족한 실력으로 상대에게 보복하기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대적자에게 부어지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하나님께서, 시인이 저주하는 기도대로 다 들어주신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또, 인간적으로 볼 때, 이 기도들이 잔인하고 유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기도들을 들으실 때는 적어도 정직한 기도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불의의 세계, 부정의의 세계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로 올려 보내드리는 믿음의 행위인 것입니다. 내 손으로 직접 복수하고 내 손으로 원수의 피를 흘리는 것 대신 하나님의 손에 복수를 맡기는 행위는 정말 믿음의 행위라 볼 수 있습니다. 신약의 사도바울은 로마서 12장 19절에서도 신명기 32장 35절을 인용하여,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생애를 볼 때, 그는 정말 자기 손으로 사울 왕에게 친히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까닭 없이 자기를 공격해오는 사울 왕을 향해서, 심지어 기회가 왔을 때에도, 복수의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광야 가운데 아무리 괴로워도 오직 하나님의 손에만 복수를 맡겼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건지셨습니다. 다윗을 의롭다 하시고 친히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들을 다 물리쳐주셨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만 자신의 모든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 그리고 소원을 토해내며 하나님께 깊이 위로함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럴 때 다윗의 마음을 만져주셨습니다. 우리도 오직 하나님 앞에서 위로함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억울함, 분노, 섭섭한 감정을 기도로 하나님께 아룀을 통해, 온전히 고백함을 통해 마음이 씻겨지고 치유 받는 기도를 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넓은 자비하심으로 우리의 투정과 어리광을 아버지와 같이 받아주십니다. 다윗의 또 다른 시, 시편 62편 8절에서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이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