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형 목사 / 시 113:1-9

◎ 본문: 시 113편 1-9절
◎ 제목: 낮은 곳에 임하신 주

1. 본문개요 및 관찰
    1) 1-3절: 지금부터 영원까지 찬양받으실 여호와
    2) 4-6절: 자신을 낮추신 높으신 여호와
    3) 7-8절: 가난한 자를 지도자들과 한자리에
4) 9절: 불임 여성에게 자녀를 주시는 여호와

2. 적용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자주 놓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이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지요. 아예 출발점이 다른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놓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실지 수 있습니다. 너무 당연한 건데 우리가 그걸 이해 못한다는게 말이 되느냐는 거죠. 하지만 우리가 의외로 그러한 인식을 잘 못합니다. 그래서 외람되지만 하나님을 ‘함부로’ 대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받아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아픔, 슬픔, 고통, 해결되지 않는 모든 문제들을 다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이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친근히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모든 것을 다 받아 누릴 자격이 있다는 말이지요.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친근한 분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해서 그분께 함부로 해도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은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찬양을 받으실 여호와’이십니다. 찬양이 끊어지지 않을 영원하신 지존자이십니다. 본질적으로 그분은 ‘신’이시고 우리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우해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경거망동 하지 않고,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대우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 방법이 다름 아닌 ‘찬양’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편 113편은 1~3절을 할애하여 계속해서 우리들을 향하여 계속 어떤 행위를 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다름 하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높여드리고 찬양해야 할 이유를 4절에서 설명합니다.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왜 하나님은 찬양 받으셔야 만 합니까?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뿐입니다. 그분은 ‘높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높아도 그냥 높으신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권력을 다 합친 것 보다 높은 위치이고, 그 영광은 저 우주 보다 더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높으심, 명예, 영광은 이 땅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그런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것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결코 ‘피조물’은 ‘창조자’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는 그 범위를 넘어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겁니까? 그리고 그분께 기도와 간구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 높으신 분이 친히 저와 여러분의 수준으로 ‘낮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5~7절이 그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7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그렇습니다. 스스로 낮추셔서 우리에게 다가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아뢸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얼마만큼 자신을 낮추셨습니까? 자신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기까지 낮추셨습니다. 그 낮추시는 ‘사랑’이 있었기에 죄악의 먼지 더미에서 뒹굴던, 추악하고 더러운 죄의 거름더미에서 허우적대던 그래서 이미 완전히 죽어 있던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습니까? 지금 저와 여러분이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예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는 이유와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그분의 ‘낮추심과 맞추심’에 있습니다. 우리가 도저히 그 수준에 도달할 수 없느니, 그분이 친히 내려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눈높이를 맞추어 주셨습니다.

성탄절 새벽입니다. 세상은 성탄절이고, 휴일이고 웃음꽃이 만발해 있지만, 사실 성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가슴이 찢어지고 고통스러운 날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죄 사함의 제물로 이 땅에 ‘성육신’하여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성탄절 새벽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낮추어 주심과 맞추어 주심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마음에 잘 새기며 나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교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마다 내 마음의 중심을 살펴야 합니다. 날마다 주의 보혈을 의지해야 합니다. 겸손히 나가야 합니다. 겸손히 나아갈 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온 종일, 평생, 영원토록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참 하나님으로 대우할 때에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새벽에 다시 한 번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되돌아보고 참된 회복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여호와 만군의 주’로 인정하고 나아갈 때에 더 좋은 것으로 더 충만한 것으로 우리의 삶이 풍성해 질 줄로 믿습니다. 그 비결을 다 받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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